선선하고 달콤한 바람 같은…반갑다, 중견가수 이지형의 신곡
[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요즘 나는 전날 나온 신곡들을 훑어보고 들어보는 일로 업무를 시작한다. 마음에 드는 노래는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놓고 자주 듣는데, 가요로 한정하자면 태양의 ‘나의 마음에’, 하이키의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신곡은 아니지만 빅나티의 ‘밴쿠버’ 등등이 상위권에 있다. 그리고 며칠 전 이 노래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되었다. 이지형의 노래 ‘어느 밤 취한 밤’.
매일 많은 신곡이 쏟아져 나온다. 음악 듣는 일이 업무의 일부인 나조차도 다 들어보지 못할 정도다. 케이팝이 많고, 예능프로그램 경연대회로 이름을 알린 가수들도 부쩍 늘었다. 실용음악과를 졸업하고 가요계의 문을 두드리는 신인 가수들도 매일 등장한다. 그 틈에서 20년 이상 활동한 중견 가수의 신곡을 발견할 때면 반가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곤 한다. 동종 업계 종사자의 생존 확인 같은 느낌이랄까? 나도 살아 있었는데 당신도 살아 있었군요! 이지형의 신곡을 발견했을 때도 딱 그런 기분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그의 가수 경력은 비주류의 역사다. 대로가 아닌 골목의 역사와도 같다. 한번도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늘 존재하고 활동했던 가수들의 대표적인 예랄까. 그는 소위 ‘홍대 인디밴드’ 중 하나인 ‘위퍼’ 출신이다. 그 시절에는 잘생긴 얼굴 때문에 ‘홍대 원빈’, ‘홍대 커트 코베인’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다. 라디오 프로그램 게스트로 자주 출연했는데 그런 별명이 자주 언급되던 기억이 난다. 얼터너티브 록 음악으로 출발한 그는 솔로 가수로 활동하면서 서정적이고 대중적인 음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직접 노래를 쓰고 부르는 그는 좋은 곡을 꾸준히 발표했는데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음악을 그만둘 생각까지 하다가, 2007년에 운명의 노래 ‘뜨거운 안녕’을 만났다. 사람들은 이 노래마저도 싸이가 다시 부른 버전으로 알고 있다. 원곡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토이(유희열)의 노래로 아는 경우가 많을 텐데, 객원 보컬로 노래를 부른 사람이 이지형이다. 어쨌든 이 노래 덕분에 그는 계속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까지 꾸준히 신곡을 발표하고 있다. 얼마 전에 나온 노래 ‘어느 밤 취한 밤’의 가사를 보자.
어느 밤 취한 밤/ 널 좋아하는 마음이 난 전부였던 그때
너에게 취한 밤/ 온 세상은 너 하나로 다 흔들리던 그때
이별의 감정을 담은 ‘뜨거운 안녕’과 달리 만남의 설렘을 담은 노래다. 그런데 오히려 ‘뜨거운 안녕’의 비트가 훨씬 신나고, 멜로디도 훨씬 밝다. 이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할 뿐 한번도 뜨거워지지 않는다. 오직 기타 두대와 그의 목소리뿐. 복잡한 전자음도 귀 아픈 드럼 소리도 다 걷어냈다. 통기타가 리듬을 맞춰주고 맑은 톤의 전자기타는 연주라기보다는 조곤조곤 함께 노래하는 듀엣처럼 들린다.
가수 활동을 25년 넘게 했는데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그 사람들 대부분도 ‘뜨거운 안녕’을 부른 가수로만 그를 알지만, 그는 늘 감사하다고 한다. ‘뜨거운 안녕’이라는 노래를 만난 건 행운이었고, 아직 자기 노래를 들어주는 분들에게 고맙다고. 나 역시 그에게 감사한다. 40대 중반을 훌쩍 넘은 그가 아직도 젊은 사랑을 노래해줘서 고맙다. 젊은 시절 외모 칭찬에도 불구하고 연기에 눈을 돌리지 않았고, 너도나도 트로트를 기웃거릴 때도 혹하지 않았고, 너도나도 케이팝 스타일로 노래를 편곡할 때도 꿋꿋하게 자기 색깔을 지켜줘서 고맙다.
멍하니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은 심각한 일 천지다. 전쟁이 터질 것 같고, 경제 전망은 복잡하고, 정치인들은 늘 뭔가 큰일 났다고 소리친다. 출산율은 매년 최저치를 경신하고, 일본은 방사능 오염수를 방류할 계획이란다. 이런 세상에서 사랑 타령이 가당한가 싶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사랑 타령이 필요한 때일지도 모르겠다.
봄이 물러가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태도를 풀고 수다 떨기 딱 좋은 계절이다. 자전거 타고 강가를 달리기에도 딱 좋은 계절이다. 합정이나 상수 혹은 어디에서든 소소한 술자리를 갖기 딱 좋은 계절이다. 선선하고 달콤한 바람 같은 이 노래를 듣기 딱 좋은 밤이다.
어느 밤 취한 밤, 그대와 함께라면 더 좋을 텐데. 소중했던 내 사람아 이젠 안녕. 찬란하게 반짝이던 눈동자여, 사랑했던 날들이여, 이젠 안녕.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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