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향해 간절하게 안부를 묻는다[김소연의 논픽션 권하기]

기자 2023. 6. 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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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미야노 마키코·이소노 마호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 284쪽 | 1만4000원

친구가 전해온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에 다녀왔던 며칠 전의 밤. 먼 밤길을 운전하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다가 문득 알게 되었다. 오래 함께 기대왔던 사람들, 같이 웃고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하던 친밀한 관계들 중에서 어느덧 이승을 떠나버린 사람들이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져가고 있다는 것을. 질병과의 오랜 사투 끝에 죽음 너머로 훌쩍 떠나버린 이들의 얼굴이 하나둘 눈앞에 스쳐갔다. 그들에게 잘 계시느냐 안부를 물어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차례차례 인사를 건네보았다.

여기, 오늘 소개하고 싶은 책에도 기어이 죽음을 맞이한 여성 철학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의료인류학자가 함께 등장한다.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는 암 투병 중인 미야노 마키코에게 삶의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안부를 묻는다. 질병과 싸우는 삶에 대하여 함께 질문을 던지며 동행한다. 두 사람의 사려 깊고 애정에 찬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인간이 인간에게 존중받는 당연한 일이 숭고함으로 와닿기까지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대화로 인해 인간의 언어는 가까스로 영롱해진다.

미야노 마키코의 병세는 호전되는 듯도 했다가 악화되어갔다. 가장 나약해질 때조차 미야노 마키코는 분별력 있게 자신의 고통들을 냉철하게 구분하며 받아들였다. 불운과 불행을 선명하게 구별해내는 이들의 사유는 두 사람의 한가운데에 화두로 놓인 질병을 근거로 기술됨으로써 어마어마한 설득력을 지닌다. “불운이란 한 줄로 늘어선 여러 가능성 중 실제로 한 가지(점)가 일어난 것”이며 “한편 불행은 이미 일어난 일을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 두고 의미를 부여한 결과”라는 것이다. 두 사람에 의하면, 질병은 그저 우연히 덮쳐온 불운 같은 것이다. 이를 구분해내면, 불운할지라도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한 끗 차이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질병과 싸우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한 차이로 가닿을 수 있는 성찰이다.

두 사람은 좋은 대화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따위에 초점을 두고 대화하지는 않았다. 그럴 겨를도 없었다. 희망이 사그라드는 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좌절을 견디며 마지막 힘을 내야 했고, 희망이 사그라드는 한 사람을 향해 힘을 불어넣어주기 위해서 다른 한 사람은 지혜와 애정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했을 뿐이다. 인간에게 질병이란 두려움 그 자체이다. 두려움은 인간을 한계 짓는 것에 그칠까. 그렇지는 않다. 아픈 몸은 투병 과정에서 환자의 삶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질병과 동거하며 획득하는 질문과 혜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2019년 4월 시작되어 3개월 정도 이어졌다. 모두 스무 통의 편지다. 7월22일 일본에서 이 책의 출간을 앞두었을 때 미야노 마키코는 영면했다. 3개월간 오고 간 편지 속에, 질병과 죽음이라는 묵직한 주제 때문인지 마치 30년과도 같은 두께감이 실려 있는 듯하다. 이번에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어보았을 때는 이 두께 사이에, 편지가 한 번 오갈 때마다 실려 있는 소박한 사진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같이 목격한 장면은 아니나, 함께 미소를 머금으려 고르고 고른 장면들 같았다.

우리에게 삶이 있고 일상이 있는 한, 언제고 우리가 반가워할 것들. 고마워서 빙그레 웃고 말 것들. 어느 바닷가, 초여름의 녹음, 야구장, 메밀국수, 뭉게구름, 골목에 앉아 있는 고양이의 뒷모습, 빗방울, 새 한 마리. 그리고 여름이 찬란하고 드높아진 때에 이소노 마호는 미야노 마키코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

나는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을 처음 다 읽고 책을 덮었을 때, 투병 중인 누군가에게 선물로 건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 구체적인 얼굴을 떠올리기까지 했다. 나의 부족한 능력보다는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이 더 깊이 있는 대화가 되리란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아프고 그리하여 종내는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를, 픽션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논픽션의 이야기를 선물로 건네는 것은 현실 속에서 실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장 내키는 선물이자 가장 내키지 않는 선물인 이 책. 결국은 이런 소개의 글을 통해서나마 누군가가 읽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떠올린 구체적인 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모르는 누군가들에게 이 책이 가닿았으면 한다. 아니, 이렇게 소개의 글을 쓰기 위해 내가 한 번 더 꺼내어 읽은 오늘 하루가 나에게는 선물이었다. 불운과 불행을 애써 구분해 질병과 싸운 이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독자에겐 행운과도 같아진다. 이 점(點)과도 같은 행운이 이어져 독서하는 행복감으로 번져가고야 만다. 요약해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을 읽고 난 이후라면, 설명이 필요 없어지는 경험 속에 놓이게 될 것이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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