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전쟁에 곳곳으로 흩어진 지식들…‘고대 문예 부흥’ 꿈꾸며 되찾다[이은수의 아이겐밸류 - 인간의 고유함을 되묻다]

기자 2023. 6. 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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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식을 복원하기 시작하다
조르조 바사리의 ‘6명의 토스카나 시인들’(1544). 페트라르카(왼쪽에서 세번째)가 책을 읽는 단테(오른쪽에서 두번째) 옆에 서 있다. 위키피디아
인공지능 핵심기술의 수학적 근간을 이루는 선형대수학에서 아이겐밸류는 행렬변환 후에도 변화가 없이 그 자신으로 남는 고유벡터의 고유값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인공지능의 파고가 모든 이들에게 다양하게 다가오겠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을 인간의 고유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1341년 4월8일 일요일.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의 부흥에 관심을 갖는 많은 학자들이 특별하게 여기는 날이다. 부활절이었던 이날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서른 여섯 살의 한 사내가 고대 로마 시대 이후 두번째로 계관시인(poet laureate)의 칭호를 얻는 행사가 열렸다. 토스카나 지방 아레초 출신인 이 남자의 이름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였다. 평생의 대부분을 이탈리아 밖에서 보냈던 그에게는 이날이 두번째로 로마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비록 이 언덕에서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폐허와 같이 방치된 포로 로마노의 열주들뿐이었지만, 페트라르카는 이날을 매우 특별하게 기억했다. 자신이 그토록 사모했던 고대 로마의 키케로가 활동했던 공간에서 그가 한 사람의 로마 시민으로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과거의 찬란한 영광이 아련하게 남아있는 이곳에서 그는 고전문예의 부흥을 꿈꿨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점철된 14세기 어둠의 한복판을 살았던 그는 자신의 운명을 “혼란스러운 폭풍우 속에서 사는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는 후대의 자손들은 “이 어둠이 걷히고 나면 예전의 순수한 광휘(pure radiance)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곳곳을 여행하면서 이름만 남고 사라져버린 고전들을 구하는 데 평생을 헌신했다. ‘지식을 수집하다’란 행위에 담긴 의미를 되묻는 우리의 두번째 여정은 페트라르카와 그의 꿈에 동참했던 여러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시작한다. 흔히 부르는 14세기(trecento)와 15세기(quatrocento), 그리고 전성기인 16세기(cinquecento) 이탈리아에서의 지식 수집에 시선을 고정해보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또 페르가몬 도서관의 모든 지식을 수집하려는 야심찬 계획에도 불구하고 한때 한곳에 모여 들었던 수많은 책들은 다시 흩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았다. 애초에 지식을 기록해 저장한 파피루스라는 매체가 보존에 취약한 탓에 먼지와 화재로부터 장서들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평온한 시기에도 그럴지언정 도서관을 둘러싼 수많은 정치적 격변과 전쟁 속에 많은 책들이 소실될 수밖에 없었고, 최악의 불행을 피하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책들마저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흩어진 지식들을 모으고 잃어버린 지식들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8세기 말~9세기 초 샤를마뉴 대제는 알퀴누스의 도움을 얻어 그가 레오 3세 교황에게서 받은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대로 고대 로마가 누릴 수 있었던 지식의 풍요를 일궈내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샤를마뉴의 죽음 이후 계승자들 사이의 내분과 야만족의 공격으로 인해 그가 재건했던 지식의 보관소는 와해되기 시작했고 지식은 또다시 유럽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래서 페트라르카를 필두로 한 초기의 인문주의자들이 지식 수집에 착수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딘가에서 먼지가 쌓이고 곰팡이가 슨 채로 오래도록 잊혀져버린 비참한 상태의 책들이었다.

문서사냥꾼들 열정·헌신 덕에 ‘잃어버린 전설의 지식들’ 발견…다시 세상에 속속 등장

그러므로 고대 문예의 부흥을 꿈꿨던 인문주의자들에게 있어 지식의 수집 작업은 결국 잃어버린 지식을 복원한다는 의미를 갖게 됐다. 이 복원을 위해 적어도 크게 세 무리의 사람들이 노력했다. 복원의 첫번째 단계는 아무도 찾지 않아 수북하게 쌓인 먼지의 더께를 털어내고 방치돼 있었던 책을 찾아오는 일이었다. 소위 말하는 문서사냥꾼(manuscript hunter)들의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했는데, 이들은 잃어버린 전설의 지식들을 찾아 갖은 고생을 수반한 여행을 해야만 했다. 대표적인 문서사냥꾼이었던 포조 브라촐리니는 1417년 풀다 수도원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를 처음으로 발견해 이 모든 고생을 보상받았다. 포조 브라촐리니의 루크레티우스 필사본의 발견이 어떻게 근대 과학의 탄생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탁월한 이야기꾼인 스티븐 그린블랫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소개한 적이 있다(<1417년, 근대의 탄생> 까치, 이혜원 옮김). 때로 필사본을 찾았으나 수도사들이 책을 쉽사리 넘겨주지 않았을 때, 이탈리아의 지식인들은 필경사를 보내 필사를 시켰을 만큼 흩어진 책들을 이탈리아로 간절히 들여오고 싶어했다.

필사본들을 물리적으로 발견함으로써 잃어버린 지식이 유입되기 시작했을 때, 이 지식을 소화하는 수준과 방식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어떤 지식은 당대의 지식인이 소화하기에는 지나치게 파격적이었다. 루크레티우스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전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모든 사물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후세계는 없으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생각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어떤 지식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되찾기를 오래도록 열망했던 것이기도 했다. 특별히 공화정의 형태로 피렌체를 이끌었던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체제를 이끌어나가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시민공동체와 로마공화정에서 꽃피웠던 수사학 지식을 갈구했다. 포조 브라촐리니가 1416년 장크트갈렌(생갈렌) 수도원에서 그 작품을 담은 사본을 발견했을 때, 동료 인문주의자들은 마침내 단편으로만 남았던 퀸틸리아누스의 <수사학 교육(Institutio Oratoria)>을 온전한 모습으로 읽을 수 있게 됐다. 또 어떤 지식에 대해서는 아예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많은 그리스어 필사본들이 그러했다. 베네치아는 상황이 좀 더 나은 편이었으나, 피렌체의 경우는 그리스어를 가르칠 마누엘 크리솔로라스가 오기 전까지 그리스어 필사본들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피렌체 서적상 거리는 ‘고대인 지혜’의 필사 공간이자 지식인 커뮤니티 중심 역할 톡톡
프란체스코 로젤리가 묘사한 1470년 피렌체의 전경. 위키피디아

따라서 지식 복원의 두번째 단계는 이제 돌아온 이 책들 위에 쌓인 물리적인 먼지와 생각의 먼지 더께를 털어내고 고대인들의 지혜가 응축된 책의 내용을 공부하는 일이었다. 이와 관련해 피렌체의 유명했던 서적상의 거리에 주목해볼 만하다. 피렌체의 지식인 커뮤니티가 바로 베스파시아노가 일했던 과르두치의 서점 앞 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아노가 남긴 기록으로부터 우리는 그가 필사본 제작소와 서점을 운영하며 만났던 피렌체의 많은 당대 지식인들이 잃어버린 지식을 복원하려고 어떤 애를 썼는지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피렌체의 경계를 넘어 가깝게는 로마 교황의 쿠리아, 멀게는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티움 제국 지식인들과 맺었던 교류를 통해 어떻게 자신들에게 친숙하지 않았던 지식들을 그들 공동의 교양으로 소화해낼 수 있었는지를 읽을 수 있다. 피렌체로만 국한하더라도 니콜로 니콜리, 레오나르도 브루니 등의 여러 유명인사가 베스파시아노의 서점을 중심으로 잃어버린 책을 찾아오도록, 되찾은 책들에 담긴 내용이 밝혀져 드러나도록 지칠 줄 모르고 열의를 불태웠다.

흩어진 지식들에 대한 수집을 발주하는 공간으로서, 되찾아온 지식에 대한 해석을 덧붙여야 할 공간으로서 지식의 복원에 있어 서점이 맡았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곳은 한때 흩어진 지식들을 품고 있었던 몇몇 수도원들에서 지식의 복원을 담당했던 필사공간(스크립토리움)과는 매우 대비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소리의 대비가 있었다. 필사하는 펜의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가 없었던 차분한 고요함이 스크립토리움의 분위기였던 데 비해, 새롭게 발견된 책들에 대해, 그 책들과 관련된 여러 주장들의 충돌에 대해 토론하는 지식인들의 소리가 서점의 공기를 가득 메웠다.

필사가·무두장이 등 이름 남지 않은 장인들의 노고도 한몫…마침내 ‘필사본 완성’ 결실

또 다른 도구들의 둔탁한 소리가 서점을 둘러싸고 울리곤 했는데, 지식의 복원이라는 이 거대한 작업에 기여한 세번째 무리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이들은 주로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장인들이었다. 피렌체의 아르노 강변에서 필사본의 재료로 쓰일 동물의 가죽들을 가공하던 무두장이들, 필사본 위에 글자들이 서로 겹쳐 알아보기 어려운 고딕체가 아니라 더 읽기 좋은 글자체를 만들어 텍스트를 적었던 필사가들, 그리고 필사본에 아름다운 삽화를 그려 넣었던 채식사들, 마지막으로 표지를 만들고 책을 엮으며 책의 서가에 묶어둘 사슬을 만들었던 장인들까지 지식의 복원에 이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결국 돌이켜보면, 이때 지식의 수집은 곧 사람의 수집이었다. 알프스 산맥 북부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잊힌 책을 발견하러 가는 일도, 그렇게 해서 돌아온 책을 공부하며 뜻을 밝히는 일도, 그렇게 해석된 책을 잘 만들고 엮어서 여러 지식인들에게 판매하는 일도 결국 다양한 경험과 능력을 가진 사람을 통해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많은 지식들이 소실돼 이제 그 지식들을 복원하는 일이 결국 지식의 수집이었던 이때, 지식의 수집은 곧 사람의 수집이었다. 잃어버린 지식을 온전히 되찾는다는 것은 구석구석 많은 수고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지식의 복원을 위해 모든 필요한 영역마다 탁월하게 기여할 사람들을 찾을 수 있어야만 했다.

우리가 알기로 피렌체는 그런 사람들의 수집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다. 하나둘 지식을 복원해 갈수록 ‘새로운 로마’ 혹은 ‘아르노 강변의 아테네’라는 별명이 붙었던 이 아름다운 도시로 더욱더 매력적인 지식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수백년간 먼지 속 방치된 책들…지식은 결국 그 가치 아는 사람들을 만나야 빛나는 법

르네상스라는 말이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이 1860년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바티칸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게 된 베스파시아노의 <103인 명사들의 생애>라는 책 때문에 지식의 복원에 애썼던 피렌체 문화의 풍경을 생생히 느끼게 됐고, 그 때문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대해 글을 썼다고 회고한 바 있다. 평생을 잃어버린 책들을 되찾고 주문이 몰려드는 책들을 만들어 ‘세계 서적상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베스파시아노가 정작 쓴 글은 책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책들을 되찾아 자신들의 도시를 고대의 순수한 영광으로 장식하려 했던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는 점이 인상 깊다. 하긴 많은 책들이 수백년의 시간 동안 수도원의 케케묵은 먼지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지식은 결국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만나야 빛이 나는 법이다. 그렇게 그는 피렌체 한복판에서 사람들을 만났고 그것이 곧 그에게는 지식의 수집이었다.

이 지식의 복원 작업은 결코 끝이 없는 일이었겠으나, 그래도 그들의 노력이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 짚어볼 필요는 있겠다. 모여든 지식들은 산 로렌초 성당 내에 코시모 데 메디치의 거대한 후원을 통해 세워진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모여들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어둠과 빛의 대비, 그리고 둥근 계단으로 유명한 이 아름다운 라우렌치아나 도서관(Biblioteca Medicea Laurenziana)은 공공 시민도서관의 성격을 갖게 됐다. 그것이 흔히 수식되는 대로 최초의 공공도서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지식들이 피렌체의 많은 사람들의 수고에 빚을 진 것이고, 이제 복원된 이 지식들을 다시 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러도 좋을 것이다.

브루넬레스키가 완성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돔이 수놓는 붉은빛 하늘 아래 아름다운 강변과 거리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지식의 향연이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넘쳐났던 도서관과 서점의 골목 거리들을 걸으면서 피렌체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새로운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로 역사에 각인시켰다.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노래했던 피렌체 찬가는 궁극적으로 피렌체에 있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도시에 대해 고대의 찬란했던 도시들에 비해서도 모자람 없는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증표였다.

근래 책의 역사와 관련해 읽어볼 만한 좋은 책들이 번역돼 소개됐다. 로스 킹은 베스파시아노의 서점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피렌체 서점 이야기> 책과 함께, 최파일 옮김), 바이얼릿 몰러도 중세 천년의 지식 지형도를 일곱 개의 주요도시를 중심으로 잘 풀어나가고 있다(<지식의 지도> 마농지, 김승진 옮김). 우리도 ‘읽고 쓰다’를 말하는 다음 사이클에서 이 주제와 관련해 조금 더 들어가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식의 복원으로서의 책을 수집한 일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이후 인큐내뷸러(incunabula·보통 1500년까지 가리키는 초기 인쇄본의 시기) 시대를 지나 어떻게 새롭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그때 더 살펴볼 기회를 갖고자 한다.

이제 2주 뒤 우리의 관심은 책이 아니라 사물로 옮겨간다. 영어를 통해 대비해 보자면 ‘words’가 아니라 ‘things’에 대한 관심이 되겠는데, 책이 인쇄술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소유할 만한 것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을 때, 몇몇 사람들은 책이 아니라 더 희귀한 것을 모음으로써 자신의 지식 세계를 자랑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수집하기 시작했을까? 호기심으로 꽉 찬 그 내밀한 방, 분더카머(Wunderkammer)에 관한 이야기로 ‘수집하다’에 대한 우리의 여정을 이어갈 것이다.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수학, 서양고전, 과학사를 공부하였다.

카이스트에서 수행했던 인문학과 기술의 상호 발전에 대한 연구 및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대에서 디지털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과학혁명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학 및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발전 및 혁신 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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