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클라인의 뉴욕 뉴욕[김창길의 사진공책]
“난 깨어나고 싶어, 잠들지 않는 도시에서. 그리고 발견하지. 내가 최고라는 것을, 내가 성공했다는 것을.”
윌리엄 클라인이 찍은 뉴욕의 하늘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 ‘Theme from New York, New York’처럼 장밋빛은 아니었다. 시커먼 하늘과 뻥 뚫린 하얀 구멍. 블랙홀의 출구인 화이트홀처럼 세계의 모든 것들을 내뿜는 듯한 광경. 스모그 같은 거친 대기의 입자들이 허드슨강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이토록 불길한 뉴욕의 하늘을 시나트라가 보았다면, 잠들지 않는 뉴욕에서 성공하겠다는 재즈는 결코 부르지 못했으리라. 클라인의 뉴욕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영화 <배트맨>에서 연출한 고담시를 닮았으니까. 사진 제목은 ‘원자 폭탄 하늘, 뉴욕(Atom Bomb Sky, New York)’이다. 1956년 사진집 <삶은 멋지고 당신이 뉴욕에 산다면 멋질 거예요: 황홀 증언 파티를 벌이다>의 마지막에 수록됐다.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나 지난해 파리에서 삶을 마감한 윌리엄 클라인의 첫 유고전 <DEAR FOLKS>가 서울 종로구 ‘뮤지엄한미 삼청’에서 열린다. 전시는 청년 클라인이 예술가로서 첫 면모를 드러냈던 파리에서 그린 그림들과 사진들로 시작한다. 몬드리안을 떠올리게 하는 기하학적 추상화와 카메라 없이 빛을 직접 인화한 포토그램 사진들로 ‘황홀한 추상’이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이후의 전시는 ‘파격적인 구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반전된다. 날것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스트레이트 사진이 시작되기 때문. 뉴욕·로마·모스크바·파리의 군중을 찍은 거리 사진, 거리에서 찍은 패션 사진, 패션계를 비판한 영화,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미술 작품들로 전시는 끝을 맺는다. 130여점의 작품들과 40여개의 자료를 유고전답게 195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까지 시대별로 정리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 해석될 수 있는 전시 제목에 어울리는 대목은 ‘뉴욕’에서 시작한다.
“사진을 본 모든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어이구! 이건 뉴욕이 아냐, 너무 추하고 더럽고 편파적이야…. 이건 사진이 아냐, 쓰레기야.’”
사진가의 고향이 뉴욕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윌리엄 클라인을 후원했던 패션잡지 보그 편집자들은 그의 사진을 혹평했다. 초점은 멍하고, 구도는 기울어지고, 화면은 흔들리고, 프레임은 몸뚱이와 이목구비를 무참히 잘라냈다. 클라인은 “무례하고 거칠고 잉크가 번져 있는 타블로이드 신문 데일리 버글 같은 사진집을 만들고 싶었다”는 말을 남겼다. 그를 뉴욕으로 불러들인 편집자인 알렉산더 리버만을 제외한 대부분의 미국인은 젊은 작가의 의도는 안중에도 없었고, 단지 미숙련된 사진가로 취급했다. 그럴 만했다. 당시 미국 사진가들은 아주 정밀한 사진을 추구했다. 요세미티의 대자연을 담았던 서부의 사진가 언셀 애덤스는 노출 단계를 피아노 악보처럼 정리한 ‘존 시스템(Zone System)’을 창안한 터였다. 뉴욕의 편집자들은 “내 사진들이 하루 지난 신문처럼 시궁창에 처박혀 있는 것을 상상했다”던 클라인의 말처럼 그의 사진들을 내던졌다. 클라인의 뉴욕을 평가한 것은 대서양 너머 프랑스였다. 사진가이자 영화감독이고 문필가였던 크리스 마르케가 그를 도왔다. 클라인이 직접 편집 디자인한 사진집을 1956년 쇠이유 출판사가 발행했다. 프랑스는 계속 클라인을 지지했다. 1년 후, 클라인은 ‘나다르상(Prix Nadar)’을 수상했다. 최고의 사진집을 기리는 상이다.
미국의 시선은 여전히, 그리고 한동안 냉담했다. 미운털이 클라인에게만 박혔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뉴욕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비슷한 시기에 로버트 프랭크는 중고차 포드 비즈니스 쿠페를 타고 미국 전역을 누볐다. 프랭크의 사진은 (클라인에 비한다면) 파격적인 기교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인습 타파적인 사진’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인습을 타파하지 못한 어떤 이는 프랭크의 사진집 <미국인>(1958)이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1957)처럼 방만한 문체를 보여준다고 비난했다. 허무맹랑한 지적만은 아니었다. 비트 세대 기수였던 케루악이 작성한 프랭크에 대한 찬사는 <미국인> 서문에 수록됐다. 프랭크는 그저 “매일 벌어지는 그런 장면”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는 미국 사진의 인습을 거칠게 쏘아붙였다. “시작과 결말이 있는 빌어먹을 ‘라이프’의 포토에세이들은 내가 가장 저주하는 것이었다.” 프랭크의 힐난은 적절했다. <미국 사진과 아메리칸 드림>(눈빛)을 쓴 제임스 귀몬드는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라이프’와 <루크>의 지면 대부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의 경제와 번영에 관한 좋은 뉴스들로만 가득했다”고 분석한다.
잡지의 후원을 받았지만, 윌리엄 클라인의 창의성은 구애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중고 카메라 1대와 렌즈 2개를 들고 뉴욕 거리를 들쑤셨다. 클라인은 뉴욕의 사진 작업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난 내 자신을 위해 사진을 찍었다. 난 자유롭다고 느꼈다. 사진은 내게 엄청난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클라인의 카메라는 자유로웠다. 틀에 박힌 스윙에 반기를 들었던 비밥 재즈에 열광한 비트족처럼 즉흥성과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사진 비평가 최봉림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라이프’지가 보여준 객관적이고 공론적인 휴머니즘은 증발하고, 사진가의 의식과 사진의 대상이 현실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극적인 균형과 조화에 이르는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은 함몰한다.” 여기서 ‘결정적 순간’이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설명했던 ‘균형과 조화의 순간’이다. 하지만 클라인은 브레송이 말하는 결정적 순간이란 없다고 선언했다. 카메라의 장점은 ‘우연과 우발성’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카메라는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사진집 <뉴욕>의 1부는 ‘가족’이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페이지를 넘기면 프레임 안에 꽉 들어찬 네 명의 얼굴이 등장한다. 억지로 구겨서 쑤셔 넣은 듯한 얼굴들. 뒤틀린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처럼 기이한 초상들이다. 우리의 눈썰미로는 쉽게 알아차릴 수는 없지만, 프레임에 갇힌 인물들은 출신지가 다른 이민자들이다. 이탈리안 경찰, 유대인 중년 여성, 모자를 쓴 남성은 아프리카계이며, 정갈하게 가르마를 탄 이는 히스패닉이다. 등장인물로만 보자면 사진은 ‘이민자들의 용광로(melting pot)’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피사체의 엇나가는 시선들 때문에 섞여질 수 없는 얼굴들의 몽타주처럼 보인다. 사진사의 흐름을 생각해본다면, 사진집은 뉴욕 현대미술관 사진부장 에드워드 스타이켄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클라인의 사진집이 발행되기 1년 전, 뉴욕 현대미술관은 대규모 사진전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을 열었던 터였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가족이라는 휴머니즘을 보여주려 기획한 전시였다.
휴머니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클라인의 카메라는 어린이들에게도 가차 없다. 우리를 향해 총구멍을 겨눈 아이의 표정은 순진무구하기는커녕 살기에 가득 차 있다. 아이는 20년 후 개봉한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1976)의 로버트 드니로처럼 비열한 맨해튼 거리에서 총질을 해대는 것은 아닐는지. 롤랑 바르트가 사진의 찌르는 듯한 요소라고 설명했던 ‘푼크툼’을 언급한 사진에 등장하는 충치 있는 아이는 바보스럽기만 하며, 브루클린 거리에서 두 아이가 추는 춤은 ‘병신춤’이다. 어른들은 어떠한가? 5번가 록펠러 센터 앞에 모인 직장인 남성들은 폭락한 주식 장을 바라보듯 잔뜩 얼굴을 구기고 있다.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기 위해 김벨스 백화점 앞에 모인 모피를 입은 여성들은 선글라스를 꼈지만 거만한 눈빛이 감돌며, 브로드웨이 북부의 한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카트를 잡고 순서를 기다리는 중산층 주부들 얼굴빛은 시궁창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찌들어 있다.
남녀노소가 모여 있는 군중의 표정은 어떨까? 경기장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몇 컷만 더 찍으면 재킷 안에 숨겨둔 총을 뽑을 듯이 눈을 부라린다. 도시의 외관은? 뉴욕 출신 래퍼 제이 지의 노래 ‘내 마음속의 뉴욕(Empire State of Mind)’ 속 가사처럼 화려한 불빛을 내뿜는 ‘콘크리트 정글’은 광고로 도배됐다. 세븐 업, 코카콜라, 캐딜락, 서부 영화를 광고하는 네온사인…. ‘당신이 최고’라는 담배 광고가 덕지덕지 붙은 사탕 가게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아프리카계 소년의 표정은 무기력하다. 소년은 체포된 것일까? 그의 옆에 서 있는 한 인물은 마치 리볼버 권총을 뽑을 것처럼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있다. 분주한 거리에서 성조기를 들고 메시지를 적은 흑인 남성의 표정은 다급하지만, 앞을 지나는 백인 남성들 표정은 심드렁하다. 그가 전하는 굵은 글자의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죄! 기도하라!”
윌리엄 클라인이 남겨 놓은 패션 사진들은 각별하다. 노란 택시에서 내리는 모델 안토니아, 대형 견을 끌고 택시를 잡는 돌로레스, 타임스스퀘어에 놓인 전신 거울을 통해 보이는 택시를 부르고 있는 산드라…. 클라인은 실내 스튜디오에서만 찍던 패션 사진의 무대를 거리로 확장했다. 건널목을 건너는 사이몬과 니나를 곁눈질하는 여인들을 포착한 장면은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디자이너의 화려한 의상들이 실제 삶과는 얼마나 괴리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며, 거리의 모든 것들은 기껏해야 상류층의 들러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962년 뉴욕의 한 이발관 옆에서 찍은 모델 안토니아와 사이몬을 찍은 사진은 반쪽이 날아간 채 ‘보그’지에 실렸다. 잘려 나간 오른쪽에는 아프리카계 흑인 남성이 하얀 옷을 입고 팔짱을 낀 채 쇼윈도 안에 앉아 있었다. 패션계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기이한 광경을 연출하는 그의 감각은 추후 <폴리 마구, 당신은 누구인가요?>(1966)라는 장편 영화로 이어졌다.
뉴욕에서 찍은 클라인의 사진들은 사진집 제목처럼 멋지게 사는 뉴요커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이 매력적인 이유는 뭘까? 모든 이들이 다 같은 감성을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다소 뒤틀리고 악마적인 모습에서 미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그로테스크한 감정이라고 할까?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소설 <인간 실격> 국내 번역판 표지에 인쇄된 에곤 실레의 자화상은 결코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우리는 저마다 감추고 싶은 또 다른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클라인은 리볼버 총구멍을 들이댄 소년을 찍은 사진 ‘Gun1, New York’이 바로 자화상이라고 말했다. 살기 어린 표정의 소년이 뉴욕의 클라인이라면,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오른쪽 아이는 파리의 클라인이라고.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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