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의 시론]삼성전자 감산 ‘신의 한 수’ 될까

2023. 6. 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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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고문
삼성의 치킨게임→감산 급변침
실탄 부족과 주주·임직원 반발
중국 마이크론 제재까지 작용
절묘한 선택을 한 삼성의 감산
새로운 반도체 그레이트 게임
과거 성공 방정식 통하지 않아

지난 2020년 타계한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 회장은 “반도체는 타이밍 산업”이라고 했다. 실적에 흔들리기보다 불황 때 집중 투자해야 초격차가 가능하다는 지론이다. 감산을 고민하던 삼성전자는 지난 1월 말 워크숍 때 이재용 회장의 “자신 없으세요?”라는 한마디로 정리됐다. 인위적 감산 이야기는 싹 사라졌다. 불과 두 달 보름 뒤 삼성전자가 이 회장의 결심을 뒤집어엎고 “의미 있는 수준까지 감산하겠다”고 급변침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예상외로 반도체 불황이 너무 깊다는 것이다. 하지만 숨겨진 비밀도 적지 않다.

우선, 준비되지 않은 치킨 게임이었다. 지난 연말 기준 삼성전자의 현금성 자산은 125조 원으로, SK하이닉스 5조 원을 압도한다. 삼성 관계자는 “문제는 글로벌 분산 투자를 해 놓아 당장 채권·금융상품을 매각하거나 국내로 반입하기 쉽지 않았다”고 했다. 삼성전자가 2월 14일 자회사인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0조 원을 빌린다는 뜬금없는 공시가 나온 배경이다. 기존의 감산 방침에서 갑자기 치킨 게임으로 방향을 틀면서 단기간에 해외 자산의 현금화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시장의 예상보다 당장 쓸 수 있는 ‘총알 재고’가 넉넉하지 않았다.

주주와 내부 임직원의 심상찮은 분위기도 부담이었다. 국민연금과 외국인 주주는 물론 개미투자자들도 ‘5만 전자’ 주가를 참지 못했다. 감산으로 주가가 반등하자 ‘감산 감사합니다’라는 투자보고서가 쏟아졌다. 인센티브에 민감한 임직원들도 치킨 게임으로 발생할 적자를 달가워하지 않는 등 자칫 조직에 대한 충성심까지 흔들릴지 모를 분위기였다. “회장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는 시대가 아니었다.

지난 4월 7일 감산을 공표하기 직전 또 하나의 중대한 변수가 발생했다. 3월 31일 중국이 마이크론 제품에 대해 보안조사에 착수한다는 소식이었다. 중국으로선 극단적인 자해행위이자, 치킨 게임으로 기초체력이 약해진 마이크론의 숨통을 노린 치명적 도박이었다. 자칫 마이크론이 파산하면 중국이 아니라 치킨 게임을 벌인 삼성이 가해자로 몰릴 수도 있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전쟁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에 미운털이 박히지 않으려면 서둘러 치킨 게임을 접고 약자 코스프레를 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은 한 반도체 전문가의 이야기다. “이번 치킨 게임에서 마이크론이 가장 위험할 줄 알았다. 의외로 하이닉스보다 강했다. 기술 및 원가 경쟁력이 기대 이상이었고, 지난해 말 인력 10%인 4800명을 잘랐다. 한국 기업은 이런 구조조정을 엄두도 못 낸다. 무엇보다 마이크론은 뉴욕에 142조 원 공장 건설을 약속하면서 바이든 행정부의 ‘메이드 인 아메리카’ 상징이 됐다.”

최근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지금 외국 첨단기업들의 반도체 기술은 UC버클리가 연방정부 지원을 받아 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반도체 욕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도 지난달 27일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과 만난 뒤 일방적으로 한·중 반도체 협력을 부각한 보도문을 발표했다. 반도체는 이제 수요·공급에 좌우되는 상품을 넘어, 가장 민감한 국제 전략 물자가 됐다.

삼성전자의 감산은 25년 만에 나온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 후 50여 일을 되짚어보면 삼성의 급선회는 절묘한 신의 한 수였다. 적절한 시기에 감산 불가 입장을 접었다. 마이크론은 미국의 전략적 비호를 받는 만큼 예전의 독일 키몬다, 일본의 엘피다처럼 함부로 무너뜨렸다간 어떤 역풍이 불지 모른다. 미국을 의식해 삼성과 하이닉스가 중국에서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메우지 않겠지만, 바이든 행정부의 국가적 지원 없이 과연 마이크론이 글로벌 초격차 혈투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반도체 치킨 게임은 격렬했다. 한번 빼앗긴 점유율은 시황이 좋아져도 탈환이 쉽지 않았다. 지난 40여 년 반도체 시장을 지배해온 법칙이다. 하지만 반도체는 더 이상 ‘타이밍 산업’이 아니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도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한 발 삐끗하면 미·중 반도체 전쟁 비용을 한국이 몽땅 뒤집어쓸 수 있다. 새롭게 펼쳐지는 반도체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유례없는 살얼음판을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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