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글 전성시대, 서사에서 스캔들까지 사연 참 많네[주식(酒食)탐구생활 ⑯]
베이글은 요즘 국내 디저트 시장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빵이다. 장안에 소문난 베이글 맛집들은 늘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오픈런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웬만해선 맛도 보기 힘든 곳도 많다. 갓 물 건너온 따끈따끈한 신상도 아니고 새삼스러울 일도 딱히 없는데 베이글의 인기는 뜨겁다.
외식업계에서는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는 20~30세대의 취향과 감성, 필요를 제대로 꿰뚫고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부드럽고 쫄깃쫄깃한 식감을 가진 데다 다양한 토핑과 충전재로 취향껏 맛을 낼 수 있다. 최근 입소문이 나고 있는 전문점이나 카페에서는 프랑스 케이크처럼 화려하고 달콤한 모습으로 치장한 베이글도 나오고 있지만 다른 디저트 빵과 비교해 빵 자체가 담백한 편이라 건강을 고려한 ‘헬시 플레저’ 흐름과도 맞다. 근사하면서 든든한 한 끼 식사 대용으로도 안성맞춤이다.
베이글은 뉴욕을 상징하는 빵이기도 하다. ‘뉴욕 본연의 맛을 재현한’ ‘뉴욕 스타일을 그대로 살린’ 등의 마케팅 문구가 등장하는 것은 오리지널리티에 민감한 대중들의 취향을 고려했기 때문일 터다. ‘원조’라는 정체성은 구매와 직결되는, 무엇보다 강력한 요인이 되기 마련이다.
뉴욕에 버금갈 정도로 베이글이 상징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은 곳은 또 있다. 원조를 놓고 경쟁하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캐나다 몬트리올이다. 두 도시 모두 베이글에 대한 자부심으로 둘째가라면 서럽다. 그렇다면 베이글은 어떻게 이 두 도시와 연관이 있는 걸까.
베이글은 원래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이 주로 먹던 빵이었다. 반죽의 재료는 밀가루와 소금, 이스트, 물뿐이다. 버터나 우유가 들어가지 않아 담백한 맛을 유지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식습관 때문이다. 유대인은 경전인 토라에 따라 식습관을 규정한 법 ‘카슈루트’를 엄격히 지켜왔다. 이 법에 따르면 유제품과 고기를 함께 먹을 수 없다. 우유나 버터가 들어간 빵과 고기가 한 식탁에 놓여 있다면 이 둘을 같이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 때문에 식사용 빵에는 유제품을 넣지 않고 물과 소금으로만 반죽해 담백하게 만들었다.
베이글이 북미로 상륙한 것은 동유럽 지역의 유대인들이 19세기 이후 대거 북미로 이주하면서다. 이들이 주로 정착했던 지역은 뉴욕과 몬트리올이다. 지금도 이 도시들은 유대인 인구의 비율이 높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식문화가 전해지고 현지에서 확산되면서 현재는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됐다.
베이글은 다른 빵에 비해 쫄깃한 식감이 강하다. 반죽을 바로 오븐에 굽지 않고 끓는 물에 반죽을 넣어 익힌 뒤 오븐에 굽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끓는 물에 넣으면 빵이 단단해지고 밀도가 높아진다. 물에 끓여 오븐에 굽는 과정은 같지만 두 지역의 방식은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다. 몬트리올은 뉴욕과 달리 물에 꿀이나 설탕을 넣는다. 이 과정은 몬트리올 베이글의 밀도를 높여 식감을 더 쫄깃하게 만든다. 오븐도 뉴욕은 가스나 전기 오븐을 주로 사용한다면 몬트리올은 장작을 사용하는 화덕에서 굽는다. 이런 방식 때문에 몬트리올식 베이글의 표면이 더 바삭하고 고소하다. 사용하는 오븐의 차이는 도시의 규모와 연관이 있다. 두 지역 모두 초기에는 장작 화덕에서 빵을 구웠으나 뉴욕의 도시 규모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가스나 전기오븐이 대체하게 됐다.
미국의 식문화 전문 온라인 매거진 ‘매쉬드’(Mashed)에 따르면 뉴욕식 베이글은 몬트리올에 비해 부드럽고 표면에 광택이 난다. 또 빵의 크기가 크고 링이 두꺼워 베이글 가운데 난 구멍이 작다. 때문에 다양한 충전재를 사용해 샌드위치로 먹기가 좋다. 뉴욕의 베이글 전문점에는 수십 종의 크림치즈가 있으며 훈제연어, 각종 채소와 달걀, 베이컨 등 입맛에 맞는 충전재를 골라 화려하게 즐길 수 있다. 토핑도 건포도, 마늘, 양파, 통밀, 블루베리 등 가짓수가 많다.
몬트리올식 베이글은 뉴욕에 비해 크기가 작고 가운데 구멍이 크다. 빵 자체의 질감이 쫄깃하고 은은하게 단맛이 나므로 다른 재료를 섞어 먹기보다 빵 자체의 맛에 집중하는 편이다. 크림치즈 정도를 곁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토핑도 양귀비씨나 참깨 정도다. 뉴욕식 베이글 문화에 익숙하다면 몬트리올식 베이글 문화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고 매쉬드는 설명한다.
고유의 정체성과 역사를 가진 두 지역은 오랫동안 원조 논쟁을 벌여왔다. 두 지역 베이글의 역사나 차이점을 다룬 기사나 다양한 콘텐츠에 언급된 용어를 보면 경쟁, 라이벌구도 등의 설명을 넘어서 ‘불화의 역사’, ‘천적’(nemesis) 같은 표현도 등장한다.
캐나다의 자선재단 히스토리카 캐나다가 운영하는 디지털 캐나다 백과사전(Canadian Encyclopedia)을 보면 베이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몬트리올과 뉴욕 중 어떤 지역의 베이글이 더 뛰어난지에 대한 논쟁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 음식평론가 필리스 리치먼은 워싱턴 포스트에서 ‘서반구 최고의 베이글은 뉴욕이 아닌 몬트리올에서 온 것’이라고 한 반면, 뉴욕타임스 평론가 미미 쉐라톤은 몬트리올 베이글을 두고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베이글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라고 했다.”
로컬음식에 관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웹사이트 테이스트아틀라스 닷컴에서는 베이글에 관해서는 특정 지역의 손을 들어주는 대신 아예 뉴욕식 베이글, 몬트리올식 베이글로 분류해 설명하고 있다.
뉴욕에서는 몇 년 전 ‘베이글 스캔들’ ‘베이글 게이트’로 불리는 흥미로운 소동이 벌어졌다. 소동의 주인공은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요 등장인물 미란다를 연기했던 배우 신시아 닉슨. 뉴욕 주지사 예비 후보에 도전했던 그가 시나몬 건포도 베이글에 크림치즈와 연어를 올린 베이글을 주문하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역겹고 괴상한 조합’ ‘베이글에 대한 범죄’ ‘기괴한 식성’ 따위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베이글에 대한 뉴요커들의 자부심과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베이글의 도시 뉴욕을 대표하는 베이글 ‘맛집’으로는 여러 곳이 거론된다. 그중 앱솔루트 베이글, 에샤 베이글, 베이글 홀, 코샤르 베이글, 픽어베이글 등이 자주 언급되는 곳들이다.
몬트리올 역시 여러 개의 베이글 전문점이 있지만 페어몬트 베이글, 생비아토 베이글 등 두 곳은 몬트리올 베이글의 역사이자 정체성으로까지 인식되는 곳이다. 몬트리올 방문객들에게 인기 있는 푸드 투어 프로그램에는 이들 베이글 가게를 방문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페어몬트 베이글은 최초로 우주로 나간 베이글로도 유명하다. 2008년 나사(NASA) 국제우주정거장 탐사에 나섰던 우주선에 이곳의 참깨 베이글 3봉지(18개)가 실렸다. 캐나다 온라인 신문 데일리 하이브에 따르면 탑승했던 우주비행사 그레고리 체미토프는 몬트리올 출신으로, 페어몬트 베이글 없이 6개월간 우주 임무를 수행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에서 성업 중인 베이글 전문점 중 뉴욕스타일이라고 꼽히는 곳들은 라츠오베이글, 마더린러 베이글 등이다. 지난해에는 뉴욕 브루클린에 1호점을 둔 니커버커 베이글 2호점이 서울 송파구에 문을 열었다. 몬트리올 스타일로 푸디들에게 인정받는 곳은 코끼리베이글, 그리고 지난해 캐나다에서 국내에 상륙한 웨인스 베이글이 꼽힌다. 딱히 두 지역을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저마다의 개성과 특징을 내세운 베이글 전문점들도 많다. 올 초 출시한 ‘두번 쫄깃 베이글’로 인기를 모은 파리바게트는 연구원들이 원조인 몬트리올식과 뉴욕식 베이글을 연구해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맛과 식감을 완성했다고 밝혔다.
특정한 음식이 다른 지역으로 전해지면 원형 그대로 유지될 수도 있지만 현지 스타일과 결합해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거나 진화하게 마련이다. 음식콘텐츠 기업 다이어리알 이윤화 대표는 “베이글의 인기가 과몰입이라고 할 정도로 뜨거워지면서 다양한 개성과 응용법이 더해지고 있다”라면서 “한국식 베이글이 ‘빵 덕후’의 취향을 저격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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