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10. 울릉도 수장에게 벼슬을 내리다

최동열 입력 2023. 6. 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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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좌측·규장작 소장), 고려사절요 기록. 태조 13년(930년) 8월에 우릉도에서 백길과 토두를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런데 토두의 ‘두’ 자가 고려사에는 豆로 고려사절요에는 頭로 각각 달리 표기돼 있다.

■고려 태조 때 우산국 수장에게 벼슬 하사

-우산국에서 입조해 토산물 진상

서기 512년에 단행된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이후 우산국은 한동안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산국이 다시 사서(史書)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418년이 지난 뒤인 고려 태조 13년(930년) 때이다.

고려사 태조 13년 8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기에 백길을 정위(正位)로, 토두는 정조(正朝)로 삼았다.’

울릉도에서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으므로,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은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뒤 ‘우산국이 귀복해 매년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는 삼국사기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우산국이 신라에 그러했던 것처럼 고려 또한 종주국으로 받드는 주종(主從) 관계가 이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고려 조정은 백길과 토두에게 벼슬을 내리는데, 총 16등급의 관등 가운데 13위인 정위와, 12위인 정조 벼슬을 준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보통 관직의 관등을 기록할 때는 높은 관등부터 먼저 쓰는 것이 순서일 텐데, 여기서는 한 단계 아래인 정위 관등이 먼저 기록돼 있다는 점이다. 또 토두에 대해 고려사에는 토두(土豆)로, 고려사절요에는 토두(土頭)로 ‘두’ 자가 달리 표기됐다. 이를 두고 김윤곤 영남대 명예교수는 지난 2003년에 발표한 ‘우산국·우산도인의 해상 활동과 한(韓)동해문화권’ 논문(민족문화연구총서 26권,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백길과 토두는 두 사람의 사자(使者)가 아니라 사자는 백길 한사람 뿐이며, 토두는 토두(土頭), 즉 우산국의 수장을 뜻하는 것”이라며 우산국 수장이 사자를 보내 방물을 바친 것으로 분석했다. 우산국의 수장에게는 한 단계 높은 정조 벼슬을 내리고, 그가 보낸 사자에게는 아래 단계인 정위 벼슬을 내린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자(使者)를 보낼 수 있었다는 것, 또 고려가 벼슬을 내렸다는 것은 우산국이 그즈음에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산국이 방물, 즉 조공품을 바친 것은 고려 태조 때뿐만이 아니다.

고려사에는 이외에도 덕종 원년(1032년) 11월과 충목왕 2년(1346년) 3월에도 방물을 바치고, 내조(來朝)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덕종 원년 기록을 살펴보면, ‘우릉성주(羽陵城主)가 그의 아들인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고 되어 있고, 충목왕 2년 기록에는 ‘동계(東界)의 우릉도(芋陵島) 사람이 내조(來朝)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 탄생 초기인 930년부터 말기에 해당하는 1346년까지 지속적으로 우산국이 토산품을 바치고, 내조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산국은 고려시대를 관통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고려에 복속, 방물을 바치고 협력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한반도 본토와 마주보고 있는 울릉군 서면 태하리 해변의 전경. 과거 고려·조선시대에 배를 타고 동해를 횡단하면 가장 먼저 닿게 되는 해변이다.

■후삼국 중 고려의 우위가 완연해지는 시점에 입조(入朝)

-한반도 본토의 정세에 매우 밝았다는 방증

그런데, 우산국이 고려에 첫 방물을 바친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

다들 주지하다시피 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고, 고려와 후백제 등이 치열하게 패권 다툼을 하는 전국(戰國)과 같은 시대 상황이 전개된다. 그런데 태조 13년, 즉 우산국이 방물을 바칠 때에 이르러서는 고려의 우위가 뚜렸해지는 상황으로 접어들어 우산국이 방물을 바치기 직전인 그해 2월에는 명주(강릉)로부터 흥례(興禮·현재의 울산)에 이르기까지 110여개 성(城)이 고려에 항복하는 지경에 이른다. 울릉군지는 이에 대해 역사 편에서 “명주-흥례부에 이르는 110여개 성이 항복했다는 것은 신라의 동쪽 연해지방 전체가 망라돼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고려 태조 13년 2월에 명주에서부터 흥례(현재의 울산)에 이르기까지 신라 동부 해변의 110여개 성이 투항해 왔다는 고려사 기록. 동해 연안 고을이 대거 고려에 투항한 직후인 그 해 8월에 울릉도에서 고려에 입조, 토산물을 바친다.

우산국이 이렇게 절묘한 시점에 고려에 사자를 보내고 벼슬을 받은 것은 동해상에 멀리 떨어진 섬 이기는 해도 신라 말, 한반도 본토의 혼란 상황을 계속 탐지하면서 본토의 정세에 매우 밝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즉, 동해안은 물론 국내 전역에서 고려가 완연히 주도권을 잡고, 새로운 패자(覇者)로 등장하는 상황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동해상에서 독자 세력으로 남을 수는 없다는 판단을 하고, 동해 중남부 전역을 중심으로 110여개 성이 고려에 항복하는 아주 적절한 때에 고려에 복종의 예를 취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국내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보 연결 라인이 반드시 가동되고 있어야 한다. 우산국이 비록 육지에서 130.3km(울진 죽변항 기준) 떨어진 섬이기는 하지만, 외부 세계와 단절된 절해고도 ‘외딴섬’이 아니라 육지와 빈번히 교류하면서 신라 세계의 일원으로서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정보를 얻는데 소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의 전개에 구성원으로 참여함으로써 사회·문화적 발전과 함께 여진족과 왜구 등의 침입으로부터 안위를 도모하는 군사적 보호·협력 관계도 설정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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