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물가쇼크의 주범?… 세계경제 주무르는 ‘중개자들’[북리뷰]
하비에르 블라스·잭 파시 지음│김정혜 옮김│알키
싼 원자재 비싸게 되팔아 차익
3대 기업 12년간 100조 벌어
정치 질서에도 막강한 영향력
“中 약화·사회적 압박 커지며
위세 꺾였지만 여전히 건재”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라는 책이 있다. 실제로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가장 먼저 움직이는 이는 누구일까. 아마 원자재 중개 업체일 것이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원두를 사들여 원두 가격을 조종할 테니 말이다.
커피콩을 비롯해 석유, 천연가스, 철광석, 곡물 등 원자재를 중개하는 업체와 중개자의 세계를 다룬 흥미로운 책이 나왔다. 책은 이들이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숨은 실세이며 공급망 위기, 물가 상승, 패권 전쟁의 진짜 원인이라고 꼬집는다.
신간 ‘얼굴 없는 중개자들’은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의 원자재 담당 기자를 거쳐, 블룸버그뉴스에서 원자재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하비에르 블라스와 잭 파시가 함께 쓴 책으로, 지난 20년간 수많은 원자재 중개업 종사자들과 만나며 취재한 내용을 집대성했다. 저자들의 취재 과정은 녹록지 않았는데 대부분이 비상장 기업인 원자재 중개 업체들이 아직 음지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에게 직접 “책을 쓰지 말라”고 경고하는 대표도 있었다.
책은 원자재 중개 업체의 기틀이 마련될 때부터 시작해 현재 세계 3대 원자재 중개 업체인 글렌코어, 비톨, 카길이 탄생하기까지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들이 돈을 버는 원리는 꽤 단순하다. 특정 지역에서 싼 가격으로 원자재를 사고 다른 지역에 비싼 가격으로 되팔아 그 차익을 취하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지만 이들이 내는 수익의 규모는 간단치 않다. 2000∼2011년까지 12년간 이들 세 기업의 순이익을 모두 합하면 763억 달러(약 100조 원)에 이르는데, 이는 애플이나 코카콜라의 같은 기간 총 누적 이익보다도 더 많은 액수다. 해당 기업들에 다니는 직원들의 연봉도 어마어마하다. 회사의 모든 지분을 직원끼리 소유하는 비톨에선 지난 10년간 트레이더이자 주주인 몇몇에게 100억 달러 이상이 배당됐고, 카길의 직원 중에는 억만장자가 14명이나 있다.
이들이 세계 경제, 나아가 정치 질서에 미치는 영향력도 엄청나다. 이들은 미국산 밀과 옥수수 수백만t을 미국 정부 몰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으로 수출해 소련 체제의 막바지를 떠받쳤고,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미국의 제재를 피해 석유를 수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동맹이자 러시아 국영 석유 업체 로스네프트의 회장인 이고르 세친이 급히 100억 달러를 필요로 했을 때 그에게 손을 내민 것도 이들이다.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이익’만 보고 움직인다. 윤리나 이념, 정치는 이들에게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큰 영향력과 부를 쥐게 됐을까. 책은 그 계기가 된 네 번의 사건을 서술한다. 시장 개방과 소련 붕괴, 중국 경제의 성장, 그리고 세계 경제의 금융화가 그것이다. 시장 개방으로 석유가 자유롭게 거래되기 시작하면서 원자재 중개 업체들은 중동과 중남미 국가들과 거래를 맺을 수 있었고, 혼란의 한복판에 놓였던 소련에서는 자금난에 빠진 광산과 공장에 생명줄 역할을 하는 동시에 천연자원을 유리한 조건으로 넘겨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막대한 소비력을 지닌 중국이 산업화되면서 원자재에 대한 막대한 수요가 열렸고, 세계 경제의 금융화로 업체들은 현금 대신 차입금과 은행 보증을 활용하면서 대량 거래와 대규모 자금 조달이 가능해졌다.
책은 이들의 위세가 예전 같지는 않다고 이야기한다. 지속 가능성, 기후변화, 윤리적 경영 등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갈수록 거세지면서다. 여기에 원자재 호황을 주도했던 거대한 엔진이었던 중국의 성장도 서서히 꺾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당시 이들이 올린 막대한 수익은 이들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팬데믹으로 모두가 이동을 멈추며 석유 수요가 급감했던 그때, 이들은 싼값에 석유를 사재기해 대형 유조선들에 쟁여놨고 이후 비싼 가격으로 매도했다. 글렌코어는 2020년 상반기에만 에너지 거래로 13억 달러(1조7000억 원)를 쓸어 담았는데, 이는 글렌코어가 석유 거래로 달성한 최고 실적이었다.
이처럼 저자들은 비록 지금의 원자재 중개 업체들이 여러 위협을 받곤 있지만 석양 저편으로 조용히 사라지진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들이 지금처럼 세계 천연자원 무역의 가장 좋은 자리를 유지하는 한 달라지는 것은 없다”면서 말이다. 604쪽, 2만5000원.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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