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지상주의자 김환기의 삶…물결 치듯 담아낸 ‘품격의 전시’
그리고 또, 그리고, 그렸다. 온 평생을 붓질했다. 선을 긋고 면을 칠하고 점을 찍었다.
거장 수화 김환기(1913~1974)에게 그림은 꿈틀거리는 인생과 한몸이었다. 20세기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이중섭, 박수근과 더불어 삼대가로 추앙받게 된 이 거장에게 멈출 수 없는 생의 힘이자 의지는 그림이었다. 인생 고비에 닥친 전쟁과 이방인 생활의 고통은 장벽이 되지 못했다. 치솟는 조형의지는 밤하늘과 바다를 표상한 푸르죽죽한 색면과 그 위에 무수히 그어진 달과 항아리의 둥근 선, 끝없이 번져가는 선과 점들로 모습을 바꿔가며 나타났다.
삼성문화재단 산하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이 최근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지난달 18일 시작한 김환기 회고전 ‘한 점 하늘 김환기’는 품격을 느끼게 하는 전시회다. 김환기 회화의 50년 변천사를 아름답고 처연한 형과 색의 흐름으로 드러내는 까닭이다. 기획진은 시대별 대표작들과 도판만 확인되던 초기작들, 미공개작 등 유화 88점을 내걸고 유족으로부터 빌려온 1950년대 스케치북, 드로잉, 유품, 편지, 청년 시절 사진, 낡은 스크랩북 등도 처음 꺼냈다. 그러나 전시의 미덕은 이런 화려한 제원이 아니라 작가 의식 내면과 잇닿으며 물흐르듯 이어지는 작품들의 맥락이다. 기존 전시들처럼 ‘구상과 추상’, ‘파리시대와 뉴욕시대’ 등으로 작품 연대기를 단락짓는 구성을 취하지 않았다. 청년시절부터 말년까지의 작품세계의 변모과정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의 행렬이 각각의 창작 동기를 뒷받침하는 작가의 글, 아카이브 등과 어울리면서 교향악 선율처럼 유장한 흐름을 타고 눈앞을 지나쳐간다.
1935년 일본 도쿄에 예술학도로 유학와 추상그림에 심취한 그는 도쿄 스루가다이에 있는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를 다니면서 연구소의 잡지에 실은 기고글에서 ‘회화예술 그 자체가 이 세상에 없었다면 나라고 하는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행복하다’고 사자후를 토하며 붓을 잡고 미친 듯 초현실주의와 추상의 세계를 탐닉했다. 그는 그 뒤 1974년 미국 뉴욕의 병원에서 61살로 숨을 멈출 때까지 청년시절 내뱉은 자신의 말을 그대로 따라가는 삶을 살았다.
그의 그림은 끊임없는 변주를 거듭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프랑스와 미국에 머물며 작업했던 김환기는 평생 가장 한국적인 것에서 범세계적인 속성을 찾아냈다. 산, 달, 별, 하늘 등 한반도 특유의 자연 풍광과 교감하면서 서구 추상회화의 조형성과 민족적 정체성을 융합시키는데 정열을 쏟았고, 그런 평생의 노력은 서구성, 민족성을 무화시키는 거대한 점화라는 열매를 맺는다. 이런 과정이 2층의 1부와 1층의 2부로 나뉘어 펼쳐진다.
먼저 2층 전시실이다. 푸르죽죽한 빛깔을 바탕에 깔고 빵떡 같은 달과 세모꼴 잎새 무늬가 무수히 찍힌 나무의 단순한 형상을 담은 1948년작 <달과 나무>로 서두를 수놓은 1부는 세간에 알려진대로 달과 달항아리, 산, 구름으로 표상되는 김환기의 1930~1950년대 명작들을 줄줄이 보여준다. 하지만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그의 고뇌가 담긴 일기와 잡지 등에 기고한 글들이 따라붙는다. 한국전쟁기 거친 필치와 색감으로 산을 그린 소품과 피난민의 가옥을 명도가 밝은 빛으로 그린 그림들의 언저리에는 1960년대 <사상계> 등에 기고했던, 당시 그의 고달픈 그리기 노동의 실상과 소회를 담은 글월들을 인용문으로 볼 수 있다.
1951년 부산 피난시절 생철지붕 밑 허리를 펼 수없는 다락 속에서 줄곧 그림 그렸던 기억을 술회한 대목을 본다. ‘한번은 복중에 일을 하다말고 내 정신 상태를 의심해 보았다. 미쳤다면 몰라도 그 폭양이 직사하는 생철지붕 바로 밑에서…무슨 급한 부탁도 아니요…그저 그릴 수밖에 없었다…예술과 싸운다는 말을 이 다락 속에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하늘과 달, 백자, 인간을 보는 작가의 빨아들일 듯한 시선은 1960년 완성했다는 사실이 발굴된 작가 수첩에서 처음 확인된 대작 <여인과 항아리>가 내걸린 가장 안쪽의 전시장과, 이 대작을 원거리에서 마주보는 도입부의 <백자와 꽃>의 대비된 구도에서 직감할 수 있다. 전시에 처음 공개하는 작품으로 단풍에 젖어든 산의 자태를 점묘로 표현한 <산>(1940년대 후반∼50년대 초)은 1960년대 점화 작업을 예고하는 형상이 작가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일깨운다. 밤하늘의 청회색빛과 백자의 흰빛을 반영한 전시장 벽은 달항아리의 부드러운 윤곽선을 반영한 부드러운 곡면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 공간 속에서 <여인과 항아리> <백자와 꽃> 사이의 시선축을 중심에 두고 자연경물을 담은 김환기의 1930~1950년대 작품(<론도> <영원의 노래> <여름달밤>)들이 양 옆에서 우아하게 빛나며 관객의 시선을 만난다.
1층의 2부는 김환기가 196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참가를 계기로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뒤 새로운 추상 세계를 찾아가는 탐색과 완성의 과정을 세부 시기별로 정교하게 선택하고 작가의 일기 텍스트까지 첨부한 점화 계열 작품들의 성찬으로 보여준다.
이 영역 작품들의 도상에서 50년대의 달항아리는 사라졌다. 달, 하늘과 산, 구름 등의 자연경물들은 서서히 선과 점으로 단순하게 추상화한다. 뉴욕에서 처음 그린 <야상곡>(1964)은 50년대식 김환기 화풍의 종말을 예고한다. 나이프로 물감을 펴서 바르면서 기존 하늘과 달의 이미지 풍경을 보여주지만 과거 비슷한 구도의 붓질한 작품에 비해 어딘지 어색해 보이고 이후 작품에서 이 도상은 영영 자취를 감춘다.
그 뒤 율동하는 전시장벽의 곡선을 따라 친구였던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한 구절에서 제목을 따온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와 지난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당시 환율로 약 132억원에 낙찰돼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낙찰 기록을 세운 <우주>(Universe 5-IV-71 #200)같은 점화 명작들의 행렬이 말미까지 이어진다. 점들의 군무가 수평적 선율로 이어지는 <어디서…>와 휘황한 곡선으로 아롱진 <우주>가 서로 나란히 이어지며 조우하는 전시 구도는 처음 내보이는 것이다.
덕분에 네모윤곽을 씌운 점들이 일렬로 수평선을 형성하다가 리드미컬한 곡선과 사선의 궤적으로 변화하고 색감까지 바꾸어가면서 퍼져가다 검은빛의 점화로 갈무리되어 작가의 죽음 앞까지 치달려가는 말년 회화세계의 극적인 스펙트럼을 생생하게 만나게 된다. 작가의 죽음 직전 그려진 검은 점화 <17-VI-74 #337>(1974)은 검은빛의 점들 속에서 표연한 기둥처럼 우뚝 선 수직의 의지를 여백으로 표상한다. 작가는 70년대 초 사위 윤형근 작가와 딸에게 보낸 편지에 털어놓는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그 점을 찍는 일을 하고 있다. 오만가지 죽어간 사람, 살아있는 사람, 흐르는 강, 내가 오르는 산, 돌, 풀포기, 꽃잎-점으로 오만가지를 생각하며 알 수 있는 내일을 생각하며 점을 찍어간다…예술이란 절정이 없는 산이로라…’
전시는 말년 오직 점과 색에 기대어 마음을 비워나갔던 김환기의 그림 여정을 핍진하게 보여준다. 점을 촘촘히 찍은 대작에 거대한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담고, 그리움과 애상을 함께 녹여 넣은 김환기는 서구의 여느 모더니즘 추상화가들처럼 냉혹한 이성과 지성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추상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자연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애정, 회한, 향수를 내면에 품고 화면에 발현시킨 정서적인 화가였다. 호암미술관 회고전은 마음 따듯한 그림 지상주의자 김환기의 삶의 나날들을 가슴 저미는 작품과 글들을 엮어 이야기한다. 30년대 초창기 화가에 입문하던 시절 행적과 화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허실이 보이지만, 이는 사료 발굴과 재조명에 둔감했던 한국 미술계 전체의 책임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전시는 9월10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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