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의 주모 전산옥은 없지만…더 매혹적인 '영월 베스트셀러'
영월 황진이를 아는가? 20세기의 가장 유명했던 주모 전산옥全山玉(1909~1987) 말이다. 그녀는 전설이 아닌 실제 인물이다. 동강은 1960년대까지 정선에서 영월을 거쳐 서울로 가는 물길이었다. 떼꾼들의 고속도로였던 것. 물길 곳곳에는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주막이 있어 숙식을 해결했다.
떼꾼은 도로 사정이 좋지 않던 옛날, 강물을 이용해 목재를 서울로 운반하던 이들을 가리킨다. 정선에서 서울까지 보통 5일이 걸렸으며, 힘든 만큼 많은 돈을 벌어 "떼돈 번다"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전산옥은 강가의 많은 주막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스타급 주모였다. 빼어난 미모와 입심을 갖추었고, 정선 아리랑을 기막히게 불렀다고 한다.
서울까지 소문이 자자했으며, 정선 아리랑 가사에도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황새여울, 된꼬가리에 떼를 지어 놓았네.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놓게.' -정선 아리랑 중에서-
떼꾼처럼 전산옥을 만나러 갔다. 인스타그램의 스타 등산인 이민정(@rachelly_runs), 최서윤(@choifree_)씨가 주인공이다. 영월군은 2010년 잣봉을 거쳐 어라연을 구경하고 동강을 따라 걷는 8km의 등산로 겸 걷기길을 만들었다. 시작은 시멘트임도, 가파르게 덮쳐 와도 기분 좋은 건, 길가를 메운 짙은 숲과 냉이꽃의 향연 덕분이다. 유럽나도냉이가 "나도~ 나도~ 봐줘"라고 수선을 떨며 꽃을 자랑한다. 고고한 귀족 같은 보라색 제비꽃이 말 한마디 없이 공기를 우아하게 바꿔 놓는다.
바람결에 달콤한 향기가 촉촉하다. 과수원 사과꽃이 절정이다. 처음 필 땐 분홍이었는데, 끝에선 하얗다. 사랑이 지나가도 흰빛으로 만개하는 아름다움, 사과는 그렇게 다 겪어내고 나서야 결실을 맺는다.
축사를 지나 이정표 따라 몇 번을 꺾어들자 산길이다. 임도가 끝나는 곳에서 만난 신갈나무숲. 잣봉인데 소나무는 있어도 잣나무는 없다. 잘 정비된 계단이 고도를 빠르게 높인다. 한바탕 땀을 쏟자 비탈이 누그러드는 능선이다. 물을 마시며 땀을 식히는데 참나무숲을 지나는 바람이 "쏴아"하는 소리를 낸다. 그러고 보니 모든 소음 사라지고 산과 나만 남았다. 센 비탈에서 토악질처럼 묵은 잡념을 쏟아내자 비로소 마음이 산에 닿는다.
잎갈나무의 사춘기 소년 같은 부드러운 수염이 새 잎을 냈다. 곧은 줄기와 파릇한 초록이 산에 정갈함을 더한다. 정상은 아쉬울 정도로 금방이다. 아담한 표지석과 여유로운 쉼터 분위기의 숲은 배낭을 내려놓기에 충분하다. 확 트이진 않았으나 동강 너머 산줄기가 벽처럼 늠름하게 뻗은 것이 한눈에 든다.
뱀을 만나면 "황쏘가리"라고 외칠 것
어라연魚羅淵으로 향한다. 20여 년 전 명승으로 지정된 어라연은 동강에서 가장 감미로운 풍경이다. 강물이 한반도 지형으로 크게 꺾어 흐르는 곳에 바위와 산이 어우러진 신神이 만든 선물 같은 풍광이다. 잣봉 산행은 어라연을 보기 위한 서론이다.
능선을 따라 급격히 고도를 내린다. 물을 마시러 고개를 숙인 기린의 목 같은 능선을 타고 내려서자 어라연전망대다. 물감을 풀어 놓은 걸까? 아기자기한 바위가 놓여 있고 주위로 옥빛 물이 흐른다. 연둣빛 신록이 돋은 벼랑, 그림 같은 강물, 모처럼 미세먼지 없이 맑은 하늘, 신선이 내려와 쉬었다는 삼선암三仙巖 전설이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풍경이다.
어라연에는 큰 뱀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어라연 바위에 걸터앉아 고기를 잡던 정씨의 낚싯줄에 신호가 왔고, 당겼더니 물기둥이 솟구치면서 큰 뱀이 나타나 정씨의 몸을 휘감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숨 막혀 죽을 위기에 이르렀을 때 물속에서 황쏘가리가 뛰어 올라 톱날 같은 등지느러미로 뱀을 쳤다.
살갗이 찢어져 피를 흘린 뱀은 정씨를 풀어주고 물속으로 도망쳤다. 정씨는 구사일생한 사연을 마을 주민들에게 알렸고, 그후 은혜를 입었다고 여긴 거운리와 삼옥리의 사람들은 황쏘가리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지역주민들은 뱀을 만났을 때 "황쏘가리"라고 외치면 뱀이 도망가고, 나쁜 기운도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
계단이 있다면 당장 어라연에 내려가 더 가까이 보고 싶지만 전망대는 벼랑이다. 온 길을 되돌아가 갈림길에서 내려서자 이윽고 동강에 닿는다. 어라연은 갈 수 없지만, 아무도 없는 고요의 강을 따라 걷는 이 길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매력이 있다.
발디딤 푹신한 아담한 숲길과 순한 강물의 동행. 고양이 하품 같은 늦은 오후의 햇살이 층층나무 잎을 투영해 미묘한 빛깔로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에 춤을 추는 빛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위험하다. 지나치게 서정적이라 위험하다. 무뚝뚝한 사내라 해도 전산옥 같은 미인에게 홀리지 않고 배기기 어렵다.
여름이었다면 래프팅을 즐기는 이들로 북적였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강줄기다. 세상에서 가장 먼, 외딴 곳에 온 것만 같은 착각. 그렇잖아도 느린 걸음이 더 느려진다. 오후 5시 9분 16초의 햇살, 바람, 향기, 소리, 공기를 포장해 병상에 계신 아버지와 지친 어머니께 전해드리고 싶었다.
미인은 가고 주막 터만 남아
한없이 고요한 어라연인데, 속에선 거대한 물결이 덮쳐왔다. 짧은 절망과 환멸, 희망과 웃음이 무질서하게 오가던 일상이 진공 상태로 멈췄다. 환상 같은 봄날의 어라연이 차분히 새겨졌다.
고요 속에 100만 대군의 말발굽 소리가 다가왔다. 순둥인 줄 알았던 동강이 천둥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떼꾼들이 가장 위험한 곳이라 했던 영월 된꼬까리였다. 갑자기 강의 흐름이 거칠고 빨라졌으며, 흰 포말을 일으켜 포효하고 있었다. 여기서 숱하게 뗏목이 바위에 걸려 고꾸라지거나 부서져 나무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을 잃었다.
강줄기에서 필사의 사투를 벌인 떼꾼들의 뗏목이 닿는 곳은 전산옥의 주막이었다. 지금은 냉이꽃이 무성한 빈 터에 '전산옥 주막 터' 안내판만 있다. 긴장이 풀리고 지친 떼꾼들은 여기서 따뜻한 국밥과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을 것이다.
한번은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전산옥의 주막이 휩쓸려 떠내려갔다. 실의에 빠진 전산옥을 위해 떼꾼들은 자진해서 자투리 금강송을 싣고 와 집을 지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미모의 주모가 목 놓아 부르는 권주가는 없지만, 아리따운 동강이 구성지게 흘러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떼꾼을 위로하던 전산옥 대신, 산꾼을 위로하는 어라연이 남아 있었다.
걷기 길잡이
어라연 산소길은 산행과 걷기가 결합된 대중적인 반나절 코스다. 육산이라 경치의 시원함은 적지만, 아늑한 소나무숲과 화려한 동강 경치는 여간한 100대 명산 산행 못지않은 즐거움이 있다. 급경사 오르막과 내리막 구간이 있지만 비교적 짧아 초보자 첫 산행지로 권할 만하다. 동강어라연주차장(영월읍 동강로836)에서 찻길 따라 1km를 걸으면 이동식 화장실이 있는 갈림길에 닿는다. 여기서 이정표를 따라 잣봉에 올랐다가 어라연을 거쳐 강길 따라 이곳 이동식 화장실 앞 갈림길로 돌아오게 된다. 8km, 3시간 30분이 걸리는 원점회귀 코스다. 친절한 이정표와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꼼꼼한 등산지도가 그려진 안내판 덕분에 길찾기 쉽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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