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광장] 공깃밥 무한리필
우리나라 전체 1% 쌀 생산 간척지로 변모
먹거리 풍부, 쌀 생산 간척사업 격세지감
'이봐 해봤어'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한 유명한 말이다. 몇 해 전 이 말은 경영인 최고의 어록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정 명예회장의 이 한 마디는 그가 생전에 현대그룹이라는 대기업을 일구는 도전의 메시지로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숱한 일화 중 그의 도전 단면이 반영된 곳이 천수만 간척사업이다.
정 명예회장은 자서전인 '이 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의 글을 시작하면서 첫머리를 서산농장으로 채웠다. 정 명예회장은 서산농장에 대해 "그 옛날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돌밭을 일궈 한 뼘 한 뼘 농토를 만들어 가며 고생하셨던 내 아버지 인생에 꼭 바치고 싶었던 이 아들의 때 늦은 선물"이라며 "내가 마음으로, 혼으로 아버지를 만나는 나 혼자만의 성지 같은 곳"이라고 술회했다. 정 명예회장이 지목한 서산농장이 천수만 간척지다.
천수만 간척지는 현대건설이 1980-1995년까지 15년 간 6500여억 원을 들여 충남 서산시 부석면 창리를 중심으로 태안군 남면 당암리, 홍성군 서부면 궁리 등 3개 시군에 걸쳐 조성했다. 특히 조수간만의 차로 난항을 겪던 물막이 공사에 폐유조선을 활용해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힘든 유조선 공법(Very Large Crude Carrier·일명 정주영 공법)을 만들어낸 현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봐 해봤어'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 공법으로 당시 공사기간을 3년, 사업비를 290여억원을 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1만 121㏊(A지구 6376㏊, B지구 3745㏊)의 간척농지,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4174㏊의 담수호(간월호 2647㏊, 부남호 1527㏊)를 합쳐 1만 4295㏊에 달하는 천수만 간척지가 들어섰다. 방조제 길이는 7686m(A지구 6458m, B지구 1228m)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척지는 농지에 공급할 용수원으로 조성된 간월호와 부남호에 가을걷이를 하다 떨어지는 낙곡이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철새들의 서식환경이 조성됐고, 해마다 수백여종, 수십만 마리의 철새가 날아오는 세계적 철새도래지가 됐다. 무엇보다 당시 식량 안보 차원에서 이뤄진 간척사업인 만큼 국내 전체 쌀 생산량의 1%를 담당하게 됐다. 벼가 익어가는 가을이 되면 광활한 천수만간척지는 노랗게 익어가는 벼로 보는 것으로도 배가 부를 만큼 장관이다.
여기에 지난 1998년 6월 서산농장 내 목장에서 키워진 500마리의 소가 50대의 트럭에 실려 정 명예회장과 함께 육로를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는 이른바 '소떼 방북'이라는 역사적 장면을 연출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2003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2000여 마리의 소가 북으로 보내졌고, 이는 금강산 관광 등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물론 삶의 터전을 잃은 어민들과 수십 년 간 이어진 싸움은 최장민원으로 기록됐고, 농어·도미·민어·숭어 등 고급어종의 산란장이자 어류의 서식지 파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 명예회장이 생각 난 건 어느 식당의 '공기밥 무한리필'이란 사진 한 컷 때문. 일반적으로 1000원의 추가 비용을 받는 식당이 많은 터라 생경했다. 그 옛날(?) 보릿고개란 말이 나올 만큼 쌀이 귀하던 시절, 환경을 파괴하면서까지 바다를 논으로 만드는 간척사업이 필요했기에 격세지감은 어쩔 수 없다.
통계청이 올해 1월 발표한 '2022년 양곡소비량조사 결과'에 따르면 작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6.7㎏으로 2021년 대비 0.4%(0.2㎏) 줄었다. 이는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란다. 30여 년 전인 1992년에 연간 1인당 소비량이 112.9㎏인 것과 비교하면 절반 가까이 줄어든 셈이다. 먹던 것이 시원치 않던 그 전으로 돌아가면 차이는 더 벌어진다. 매년 비슷한 양의 쌀이 생산되는데 소비되는 양은 해마다 줄고 있으니 농민들의 땀방울 가치가 옅어진다. 쌀 말고 먹을 것이 풍부해지고, 건강을 위한 체중 감량 등으로 앞으로 쌀 소비는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야당 주도로 통과된 '양곡관리법'. 대학마다 붐이 일고 있는 '천원의 밥상'. 정 명예회장의 천수만 간척지. 쌀이란 공통분모로 머리 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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