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빈의 플랫폼S] "30년 지나 또 뭘 배워" 동독인의 역정…타산지석은
다문화 사회로의 전환·혐오 대응, 독일에서 시사점 찾기
베를린서 차관급 제12차 한독통일자문위원회
[※ 편집자 주 : 지속가능한(sustainable) 사회를 위한 이야기들을 담아낸 '플랫폼S'입니다. 지속가능과 공존을 위한 테크의 역할과 녹색 정치, 기후변화 대응, 이와 관련한 사회적 갈등 조정 문제 등에 대한 국내외 이야기로 찾아갑니다.]
(서울=연합뉴스) 이광빈 기자 = "옛 동독지역 출신인 제가 또 뭘 배워야 하는지 짜증이 납니다."
연방의회 의원과 연방경제에너지부 차관을 지낸 이리스 글라이케는 토마스 크뤼거 독일연방정치교육원장의 발표에 발끈했다. 옛 동독지역에서의 '정치 교육' 강화 등을 골자로 한 내용이었다. 글라이케는 옛 동독지역에서 태어나 자랐다. 통일된 독일의 시민이자 의원, 공직자, 엔지니어로 당당히 살아왔다고 역설한 글라이케. 통일 후 30여 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옛 동독지역 시민들을 왜 계속 '계몽'의 대상으로 삼느냐는 역정이었다.
토론 중 옛 동독지역 문제를 놓고 독일 측 인사들 간에 언성은 계속 오르내렸다. 옛 동독지역에서의 '2등 시민론'과 극우 부상 및 반난민 정서에 대한 원인과 대처 방식을 놓고도 방정식이 달랐다. 옛 동독과 서독 지역 간 경제적 격차, 옛 동독지역 인구소멸 등을 놓고도 관점 차가 나타났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독일 연방총리실에서 열린 제12차 한독통일자문위원회 회의장에서 펼쳐진 풍경이었다.
필자는 차관급 논의체인 한독통일자문위원회에 한국 측 자문위원으로 참가했다. 김기웅 통일부 차관과 카르스텐 슈나이더 연방총리실 정무차관이자 연방의원(7선)이 좌장을 맡았다.
옛 동독 주민들의 사회통합 문제는 한반도 분단 상황과는 직적적인 연관성이 커 보이지 않는 논의다. 그런데 왜 한국 측은 이 논의에서 시사점을 찾고 있을까.
생각이 다른 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의 일상화, 인구절벽 속 다민족·다문화 필요성의 증대, 그리고 같은 민족이지만 점점 더 타자가 되어가는 북한에 대한 우리 고민이 궁극적으로 독일의 고민과 그 성질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먼저 이런 문제를 경험한 독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동독의 기억' 찾기와 난민 사회통합이 연결된 까닭은
독일에선 2017년 100만명의 중동 난민이 들어온 뒤 난민 사회통합과 극우 세력에 대한 대응이 주요 과제가 돼 왔다. 이 과정에서 독일 사회가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 중 하나가 '동독에 대한 기억' 찾기다.
1989년 당시 동독에서 일어난 라이프치히 월요시위 등 '민주주의 혁명'의 기억을 소환해 독일 전체 시민의 '공통의 기억'으로 만드는 일이다. 특히 독일 지성 사회는 최근 몇 년간 이런 자유 혁명이 권위주의 체제 붕괴와 통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데 주안점을 뒀다. 총리 등 지도자들이 옛 동독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려는 발언을 해 온 것도 이런 맥락이다.
독일 사회는 서독 지역 시민들에게도 동독 지역에 대한 관심을 촉구해왔다. 이번 회의에서도 통일 후 서독으로 직업을 찾아 떠난 동독 출신들이 서독 지역 경제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점 등이 강조됐다. 슈나이더 차관은 "서독 지역민들은 동독 지역민의 감정을 이해 못 한다"며 관심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독의 기억' 찾기는 독일 사회의 다양성 확대와 연결된다. 동서독도 분단 후 40년간 다른 체제를 경험했다. 같은 민족에 같은 문화권이었지만, 주민들 간에 '다름'이 생겼다. 이를 통일 후 30여년 간 맞춰가는 과정에 있다. 이젠 동서독뿐만 아니라 이주민들의 '다름'에 대해서도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 이주민들의 이주 경험도 독일 사회 '기억의 문화' 속에서 융합되어야 이주민이 기존 독일 시민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다.
크뤼거 원장은 발표에서 "이주민들과 난민으로 사회 구조는 바뀌고 다양한 국적의 내러티브들이 만나고 있다"면서 "동독 지역 결핍에 대한 진단뿐만 아니라 독일의 다양성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시기로 새로운 독일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다만, 칸트식 '계몽주의' 관점에서의 정치교육을 통해 '기억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과거와 화해'라는 결과만 나오는 건 아니다. 동독 출신들의 감정선을 새로 자극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동독 출신 글라이케의 역정도 이런 맥락으로 느껴졌다.
이는 난민, 이주민에 대한 정치교육 등 사회 통합 작업에서도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 지점이다. 이슬람 문화권 이주민 자녀의 학교 내 '히잡' 착용 등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져 왔다. 이런 충돌은 이주민들을 자극할 수 있지만, 기존 독일인들의 민족주의 정서도 자극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독일의 고민은 진행형이다. '계몽식 정치교육이 새 갈등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으냐'는 한국 측 박명규 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질문에 크뤼거 원장은 "다양성 보장을 통해 여러 형태의 '기억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충분히 토론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동독 주민 결핍과 다민족화에 대한 대응…시사점은
한국 사회에서도 '인구절벽'이 현실화하면서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농어촌에선 외국인 노동자로 부족한 인력을 메울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미 시골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다문화 가정의 증가에 가속이 붙은 지 오래다. 자연스럽게 이민정책의 제도적, 행정적 기반을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진다. 이민청 설립은 시간 문제로도 보인다.
당장에 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학계에선 한반도 정세 급변에 따른 탈북민 대량 유입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문도 제기돼왔다. 현재 남측으로 온 탈북민들의 사회통합이 원활하게 이뤄져느냐도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같은 다민족·다문화 사회 추세 속에서 갈등 조정 및 통합 능력이 더욱 요구되고 있다. 더구나 일상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는 혐오와 증오 문화 대응도 한국 사회의 시급한 당면 과제다. 특히 한국 사회가 다양성을 담아낼 그릇을 만들어내지 못할 경우 지속 가능한 사회 발전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는 커진다. 그만큼 갈등 조정을 위해 '작은 발걸음'을 꾸준히 해 나가는 독일 사회의 모습에서 우리는 시사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독 양측 간 논의는 하루 8∼9시간 씩 이틀간 이어졌다. 그러나 분단 관리, 통일 후유증 관리, 이민자 사회 통합 등에 대한 독일의 경험을 논의하고 한반도 분단 상황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들려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만큼 분단과 통일 등을 매개로 양국 사회가 각각 짊어진 과제가 많다는 의미인 듯하다.
lkbin@yna.co.kr #플랫폼S #한독통일자문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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