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순간은 지금이니까…훌쩍 떠나 마주한 ‘푸르른 민낯’

지유리 2023. 6. 2.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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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핫플] (20) 강원 정선 민둥산 돌리네
가을 억새밭 유명하지만 초여름 풍광도 묘미
숲길 지나 정상 가까워지자 나무 대신 풀밭만
석회암지대에 화전·산불 겹치며 들꽃 등 남아
웅덩이 ‘돌리네’ 몽환적 정취로 SNS서 ‘화제’
걷기 쉽고 땅 평평 … 초보 캠퍼도 즐기는 명소
강원 정선 민둥산 정상 전경. 드넓은 초원이 싱그럽다. 증산초등학교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오다보면 정상까지 10여분 앞둔 지점에 돌리네(오른쪽 3분의 1 지점에 보이는 웅덩이)가 있다. 정선=현진 기자

제철, ‘알맞은 시절’이라는 뜻이다. 세상만사엔 다 때가 있다. 수박은 여름에 먹어야 달콤하니 시원하고 따끈따끈한 붕어빵은 한겨울에 먹어야 제맛이다. 여행지에도 적당한 때가 있다. 여름엔 바다가, 가을엔 단풍 든 산이 제철 여행지로 꼽힌다. 강원 정선에 있는 민둥산을 오르기 좋은 시기는 언제일까? 많은 이들이 가을이라 대답할 것이다. 10∼11월이면 7부 능선부터 정상까지 펼쳐진 은빛 억새밭이 장관을 이뤄서다.

그런데 때론 제철이 아닐 때 새로운 면모를 만나기도 한다. 남들은 잘 모르는 매력을 찾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민둥산이 숨긴 뜻밖의 매력은 봄·여름에 드러난다. 억새꽃의 화려함을 입기 전, 수수하지만 싱그러운 민둥산의 민낯을 보러 떠났다.

해발 1119m 민둥산을 오르는 코스는 크게 4가지다. 시작 지점에 따라 소요 시간이 1시간20분에서 3시간50분으로 나뉜다. 가장 인기 있는 등산로는 능전마을에서 출발해 억새밭을 지나는 코스다. 1시간20분이 걸린다. 뚜벅이 여행객이라면 남면에 있는 증산초등학교를 거쳐 쉼터를 들렀다 가는 길을 추천한다. 기차역 ‘민둥산역’에서 증산초까지 도보로 20분에 불과해 이동하기가 편하다. 등산 시간도 1시간30분 정도라 무리가 없다. 민둥산 탐방로는 초반에는 가팔라 숨을 몰아 쉬게 되지만 경사는 이내 끝나고 전반적으로 고른 흙길이라 초보자도 오르기 쉬운 편이다.

증산초에서 등산을 시작한다. 초반 시야를 채우는 건 짙은 녹음이다. 나무가 드리운 그늘 아래를 걷는다. 쏴쏴.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리며 내는 소리를 듣는다. 상쾌한 풀 냄새까지 맡으며 오감으로 숲을 만끽한다. 그렇게 1시간쯤 흘렀을까. 슬슬 나무와 나무 사이가 점점 멀어지며 머리 위 그늘이 사라진다. 어느새 쨍쨍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이제 눈앞엔 온통 푸른 풀밭이다. 이제야 진짜 민둥산이 시작된다.

민둥산이라는 이름은 ‘산에 나무가 없어 번번하다’라는 뜻의 ‘민둥하다’에서 따왔다. 민둥산은 대표적인 석회암 지대로 예부터 땅이 푸석해 농사를 짓기 어려웠고 이에 조상들은 화전을 일궈 농사를 지었다. 그 덕에 생계는 이었지만 산은 헐벗게 됐다. 1960∼1970년대엔 산불까지 빈번히 발생해 결국 ‘민둥한’ 산이 돼버렸다.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나무가 사라진 자리엔 온갖 풀과 들꽃이 자리 잡았다. 굽이진 능선을 덮은 너른 풀숲이 이국적인 풍광을 만든다. 초록 들녘과 그곳을 가로지르는 나무 울타리, 하늘에 핀 뭉게구름이 마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유럽의 알프스산맥 어딘가인 듯하다. 그림 같은 모습에 홀린 듯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느라 가다 서다 한다. 민둥산은 탐방로 중간중간마다 벤치가 있다. 바로 옆에 나무까지 있어 그늘에 앉아 쉬어 갈 수 있다.

석회암 지대에서 볼 수 있는 웅덩이인 ‘돌리네’. 수면에 비친 하늘이 신비롭다. 정선=현진 기자

초여름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건 ‘돌리네(Doline)’다. 돌리네는 ‘계곡’이란 뜻의 슬라브어로 빗물에 잘 녹는 석회암 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웅덩이를 말한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초록색 융단 위에 놓인 지름 50여m 동그란 물웅덩이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이색적인지 지난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돌리네 인증샷이 화제가 되며 국내인지, 해외인지 논란이 일었을 정도다.

증산초교에서 등산을 시작해 정상까지 10여분 남았을까. 벤치에 앉아 돌리네를 감상한다. 수면 위로 흘러가는 구름이 그대로 반영된다. 별천지 같은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보는 것이 물인지 하늘인지 착각이 든다. 불멍·물멍하는 기분이 이러할까. 그간 쌓인 근심·걱정·스트레스가 몽땅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이 정도면 ‘돌리네멍’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땡볕을 지나며 흘린 땀방울이 말랐을 만큼 충분히 쉬고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민둥산 정상 부근 탐방로는 계단으로 돼 있다. 계단이 고르고 폭이 좁아 오르기 편하다.

하산은 ‘밭구덕’을 지나는 길을 택한다. 밭구덕은 산 중턱에 있는 마을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억새밭 부근을 가리킨다. 과거 이곳에 구덩이 여덟개가 있었다고 해서 ‘팔구덕’이라 불렀다고 한다. 구덩이가 꽤 컸던지 화전민이 밭을 일굴 때 소가 종종 구덩이에 빠졌다는 말도 있고 움푹 팬 땅에 집을 지어 집이 기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그저 전설만은 아닌 것이, 민둥산 아래 동굴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본래 석회암 지대에는 동굴이 흔하다. 고요한 산 밑에 신비로운 탐험의 세계가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지금 밭구덕엔 광활한 억새밭은 없지만 수풀 사잇길을 거닐며 들꽃을 찾는 재미가 있다. 하늘 한번 땅 한번 번갈아 살피며 민둥산을 내려온다. 근방에도 크고 작은 돌리네가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맘껏 쉬고 사진을 찍으며 등산을 마치는 데 4시간 정도 걸렸다. 길이 평탄해 피로하지 않다. 잠깐 사이 외국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민둥산은 아는 사람만 아는 백패킹 명소기도 하다. 특히 초보 캠퍼에게 알맞다. 정상 부근에 덱이 마련돼 있어 텐트를 설치하기 쉽다. 덱이 아니더라도 땅이 넓고 평평해 잠자기가 편하다. 다만 나무가 없어 낮에는 볕을 피하기 어렵다. 정상엔 파리나 모기 같은 벌레가 많으니 모기 기피제를 챙길 것을 추천한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해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초여름 민둥산의 돌리네도 그렇다. 가을이 되면 키 큰 억새꽃이 무성히 피며 돌리네를 감춘다. 누군가는 그 모습이 최고 풍광이라 할지 모르지만, 또 누군가에겐 돌리네야말로 꼭 한번쯤 봐야 할 진귀한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니 모두에게 통하는 ‘제철’이란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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