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 물컵 절반과 오염수

김진우 기자 2023. 6. 2.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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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한·일 정상이 일본 히로시마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공동참배했다. 한국인 피폭자들은 “꿈만 같다”고 했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1945년 8월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일본인 말고도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됐다. 히로시마 5만명, 나가사키 2만명 등 7만명이 피해를 봤다. 전체 피폭자가 약 70만명이라니 피폭자 10명 중 1명이 조선인인 셈이다. 일본인 피폭자는 3분의 1 정도가 사망했는데 조선인 피폭자는 절반 이상 숨졌다. 열악한 환경과 차별 대우 속에 방치됐기 때문이다.

한·일 정상의 공동참배는 이런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알렸다는 의미가 있다. 우려스러운 점은 참배가 희생자 추모에 그친 데다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상징으로만 활용되는 것이다.

위령비 문제를 파고들면 원폭이 투하됐을 때 왜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 있었느냐는 문제와 맞닥뜨린다. 숨진 조선인 상당수는 강제동원된 이들이었다. 원치 않는 전쟁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2중의 피해자였다. 위령비 참배는 국제사회에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환기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일 정상은 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공동참배가 “한·일 평화와 세계 평화·번영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고만 했다. 2주 전 방한 때 강제동원에 대한 구체적인 적시나 사죄 없이 개인적으로 “가슴 아프다”고 했었는데, 그마저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의 방한 때 발언이 “한국 국민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띄우기 바빴다.

윤 대통령은 대일 외교에서 상식파괴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일본의 과거사 책임을 쏙 뺀 3·1절 기념사,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선제적 양보안’, 일본이 나머지 반을 채울 거라는 ‘물컵론’…. 공동참배도 이 정도 했으면 됐다는 면죄부를 줄까 우려스럽다. 일본이 원폭 피해를 내걸어 전범국 이미지를 희석하는 데 들러리 선 꼴이 될 수도 있다.

그간 일본은 과거사 문제에 ‘다 계획이 있었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일본 전범기업이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하자 그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끝났다고 반발했다. “국제법 위반”을 되풀이하면서 “한국이 해법을 가져오라”고 했다. 가해자 아닌 피해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간 것이다.

하지만 한·일 법원 모두가 인정한 건 청구권협정으로 외교보호권을 포기했지만 개인청구권은 살아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피해 사실을 일본 측이 인정하고 조치를 취하는 게 출발점이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기업의 화해 움직임을 가로막고, ‘2+2(한·일 정부 및 기업 참여) 안’도 무시했다.

일본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은 과거 청산이라는 의미를 담지 않은 정치적 타결이었다. 과거사 문제는 반공전선 구축이 시급했던 미국의 개입 아래 봉합됐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냉전 해체와 한국의 민주화, 국제사회의 인권 중시 흐름에 따라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봉합된 자리를 뚫고 나왔다.

요시자와 후미토시 니가타국제정보대학 교수는 <현대 한일문제의 기원>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청산 문제의 해결 없이 ‘전후’의 종결은 없다고 지적했다.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은 식민지 지배 책임을 수행하고 과거를 청산할 기회를, 한국인은 식민지배로 침해된 권리가 구제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로부터 반세기 넘게 걸려 한·일 시민들이 지난한 노력 끝에 만들어낸 권리 구제의 길을 양국 정부가 ‘미래지향’이라는 명목 아래 또다시 지우려 하고 있다. 그 ‘미래지향’에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양국 국민, 특히 젊은 세대가 역사인식을 심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는 내용은 있는 걸까.

윤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의 역사적 맥락이나 보편적 의미는 외면한 채 한·일관계 개선에 급페달을 밟고 있다. 일본 입장에 동조하며, 심지어 ‘나머지 절반의 물’은 안 채워도 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런 신호를 캐치한 일본이 교과서나 독도 문제 등 앞으로 줄줄이 남아 있는 한·일 현안에 어떻게 나올지는 불 보듯 뻔하다.

당장 윤석열 정부는 일본의 또 다른 외교적 승리에 손을 들어주려 한다. 비용이 가장 저렴하다는 이유로 방사능 오염수를 ‘인류의 미래’라는 바다에 버리는 전무후무한 행위의 물꼬를 트는 일 말이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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