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쓰고 달콤한 경제] 고여 있는 부(富)의 순환을 허하라

기자 2023. 6. 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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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성장과 불평등 사이에 뚜렷한 인과성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제 성장이 불평등을 강화하거나 혹은 약화하는 쪽으로 일관되게 작동하지는 않았다. 통념과는 달리 1980년대 한국은 경제적으로 비교적 평등한 사회였다. 정치적 민주화와 궤를 같이했던 1987년 이후의 전투적 노동운동이 불평등을 완화한 측면도 있지만, 한국 사회의 불평등 약화는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추세적으로 진행됐던 현상이다. 1987년 이전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시기에도 불평등 지표는 약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또한 포스코와 한국전력 등 우량 공기업들의 소유권이 국민주 공모라는 이름으로 다수 대중들에게 분산되기 시작하던 시기도 1980년대였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1980년대의 불평등 완화가 누군가에 의한 정교한 기획의 결과는 아니었다고 본다. 경제개발 이후 줄곧 확대되던 불평등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 나타났던 시기로 1980년대를 해석하고 싶다. 역사는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주식시장에서 장기 상승과 하락이라는 큰 추세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기술적 반락과 반등이라는 기술적 등락이 섞여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추세는 필연의 산물이지만, 일시적 반작용은 무작위에 가깝다.

양적 성장에만 매달리던 한국 사회에 전 국민 의료보험이 도입됐던 시기는 박정희 정권 말기이던 1979년이었다. 독일의 보수 정치인이었던 비스마르크가 의료보험과 연금 등 현대 복지제도의 초석을 쌓았던 데 비견될 만한 일이다. 비스마르크는 확산되던 사회주의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복지제도를 도입했다. 1980년대는 한국에서 경제 자유화가 시작됐던 시기이기도 했다.

수입과 금리 자유화가 1980년대 초부터 추진됐다. 레이건과 대처리즘으로 상징되는 시장 원리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된 결과였다. 정부가 거의 전담하다시피했던 경제적 자원 배분에 시장 원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과 노동조합의 활성화가 더해졌고, 단군 이래 최대 활황이었던 ‘3저 호황’은 이 모든 변화들에 든든한 물적 토대를 제공했다.

성장과 불평등, 뚜렷한 인과 없어

중국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편입과 외환위기가 있었던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경기의 순환적 사이클과 무관하게 불평등이 강화되고 있다. 불평등이 성장 둔화 국면에서 약화되곤 했다는 주장도 있다. 최병천이 쓴 <좋은 불평등>에서는 경기 후퇴로 고소득층이 타격을 받아 나타나는 불평등 완화의 사례들이 서술돼 있다. 이와는 결이 다르지만 발터 샤이델은 <불평등의 역사>에서 급격한 경기 후퇴가 공동체의 급변을 불러와 극적으로 불평등이 완화됐던 역사적 경험들을 제시하고 있다. 두 경우 모두 불평등의 해소 그 자체가 바람직한 현상이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불평등의 약화가 사회의 총량적 효용 증대로 이어졌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일률적인 평등은 가능하지 않기에 공동체 내에서 불가피하게 용인될 수밖에 없는 불평등의 정도가 어느 수준인가에 대해서는 언제나 논란이 존재한다. 다만 보수주의자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불평등 완화를 위한 노력은 경제적 자원의 더 나은 배분이라는 점에서 당위성을 가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부가 쌓일수록 소비성향은 낮아지는데, 경제적 자원이 소수에게 집중되면 공동체 내에서 순환하지 않는 돈의 규모가 커지게 된다.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는 만성적 저성장 국면에서는 이 부작용이 더 커진다.

지난 수년간 일본 주식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험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지난 4월 도쿄 증권거래소는 상장사들에 조금은 생뚱맞은 요구를 했다. ‘PBR(주가순자산비율)이 1배 미만인 상장사들은 주가 부양을 위한 계획을 증권거래소에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PBR 1배 미만의 주가는 ‘저평가’됐다고 받아들여지곤 하지만, 시장이 바보가 아니라면 주가가 디스카운트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다. 과거는 화려했으나, 미래는 불투명한 기업들의 주가가 PBR 1배 미만에서 거래된다. 과거 영업활동의 결과로 자산을 많이 축적해놨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낙관적이지 않아 순자산가치를 더 증식시키기 어렵다는 우려가 크면 PBR이 1배를 밑돌게 된다. PBR 1배를 하회하는 기업들이 계속 경제적 자원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경제 전반의 자원 배분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주주권 강화, 고민해 볼 가치 있어

미래의 성장성에 대한 우려가 존재하는 기업의 주가가 어떻게 PBR 1배 이상이 될 수 있을까? 배당금 지급 등을 통해 주주환원을 늘리면 된다. 배당은 과거에 쌓아놓은 자산인 ‘배당가능 이익’의 한도 내에서 지급될 수 있다. 주주환원이 그렇잖아도 어려운 기업을 더 힘들게 만들 수 있다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지만, 이는 기업이 쌓여있는 돈에 대한 합리적 활용방안을 주주들에게 제시하면 해결될 문제다.

기업에 고여있는 부를 경제 전반으로 돌게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2014년 ‘이토 리포트’에서 제시됐는데, 일견 월권처럼 보이는 도쿄 증권거래소의 주가 부양 요구도 이토 리포트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정책이 있었다. 2014년 박근혜 정권에서 내놓은 ‘기업소득 환류세제’가 그것이다. 기업 이익의 일정 부분 이상을 배당, 투자, 임금 인상에 사용하지 않으면 징벌적 과세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세계화의 후퇴는 불평등 완화를 위한 노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당분간 ‘공정’보다는 ‘가치’라는 개념이 더 우위에 서게 될 것이다. 주주권 증대를 통한 부의 순환이 불평등 완화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다.

그렇지만 딱히 다른 처방은 존재하는가? ‘낙수효과’는 미신이 돼버렸고, 진보주의자들의 거대 담론을 구현하는 데는 시대상황이 녹록지 않다. 주주권 강화는 과거에 벌어놓은 자산은 많으나 성장이 정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미시적 대안이라는 점에서 고민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한국의 주식투자 인구가 2019년 말 610만명에서 지난해 말 1441만명까지 늘어나 투자자의 저변이 확대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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