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친밀한 타인을 위하여

김요아킴 시인 2023. 6. 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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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등 무한생존 경쟁 속 사람보다 사물에 더 애착
타인 향한 마음의 문 열어 메마른 인간관계 변화를
김요아킴 시인·부산 경원고 교사

벌써 10여 년 전의 이맘때쯤 일로 기억된다. 당시 국어라는 과목 특성상 수업을 주로 토론실에서 했었는데, 유독 한 여학생이 교과서는 고사하고 항상 베개 하나만을 들고 왔었다. 그리고 이내 모둠활동도 하기 전, 엎드려 종이 칠 때까지 늘 자기를 반복했다. 처음엔 어디 아픈 데가 있는 건지 아니면 수업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서 그런가 여러모로 신경이 쓰였지만, 무려 3개월이나 이어지는 그 태도에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먼저 그 학생을 불러 얘기를 나눠보는 것이 순리였겠지만, 얼굴도 모를 정도로 눈 한번 제대로 맞춰 본적 없었기에 언제까지 저렇게 하나 두고 보자는 내 얄팍한 자존심이 한몫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엎드려 자는 아이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귀찮다는 듯 완강하게 반항하는 탓에 겨우 팔뚝을 붙잡고 복도로 데려 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얼굴을 처음 마주하며 그동안 쌓였던 말들을 풀어냈다. 그러고 퇴근한 뒤, 갑자기 그 아이의 담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애 아버지가 무척 흥분하여 당장 내일 학교로 나를 찾으러 오겠다는 것이다.

사연인즉 그 학생이 쉬는 시간에 병원으로 달려가 나와 실랑이를 벌이다 팔뚝에 난 붉은 자국을 이유로 진단서를 끊고, 이를 서울에 일하는 아버지께 사진으로 전송했다는 것이다. 결국 딸의 연락을 받은 그 아버지에게 있어 나는 졸지에 폭력 교사로 둔갑 돼 버린 셈이었다.

다음 날 오후, 학생의 아버지는 ‘투쟁’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붉은 조끼에 빛바랜 작업화를 신고 학교에 찾아왔었고 이에 일순간 당황했지만, 그간의 상황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해는 일단락되었다. 알고 보니 나와 동갑인 애 아버지는 딸이 이전부터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이유를 노조 일로 바빠 어릴 때부터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라 여겨 늘 미안해하던 차에 진단서 사진을 보고 그만 욱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립재단의 학교와 교사라면 곧잘 ‘비리’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 편견도 자신에게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 했다.

여하튼 사건이 잘 마무리는 되었지만, 이 일은 여러모로 내게 생각할 여지를 주었다. 그 학생과 나, 그리고 그 아버지와 나, 또 그 애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되짚어 보며 왜 이리 서로에게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았는지, 또 이를 해결할 방안은 무엇인지를 비록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기회가 되었다. 내가 먼저 그 아이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다독거렸더라면, 또 그 아버지가 교사인 나의 입장을 헤아려 함께 만났더라면, 나아가 그 아버지와 딸아이가 무시로 깊고 따스한 정을 나누었더라면 이러한 오해와 불신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서로에게 공격적인 태도도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타인에 대한 자신의 경계 본능으로 단 한 뼘의 공간도 친밀하게 허락지 않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고스란히 보여준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친밀한 타인’들의 저자 조반니 프라체토 박사는 서로에게 사랑을 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진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닌, 동등하고도 주체적인 몸과 마음의 소통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영역을 숨긴 채, 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것이 스스로 두려워 이를 외로움이라는 감정으로 포장해, 끊임없이 감정 없는 교류만을 시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아가 타인과의 친밀감을 되레 공포로 여기는 이들도 이제는 적지 않은 것 같다. 사람과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불필요한 관계를 맺지 않으려 하며 오히려 사물과 기술에 더 애착을 느끼고 이에 안심하는 이들, 즉 ‘디스커넥트(Disconnect) 인간형’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인류가 도래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5월은 ‘나’라는 존재와 가장 가까운 타인들을 생각하고 기념하는 날로 빼곡하게 채워진 달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5명 중 1명만이 교단에 만족하고, 90%가 넘는 숫자가 최근 1년 사이 이직이나 사직을 고민했다는 서글픈 기사나 자식을 통한 부모의 대리만족으로 끝없이 입시경쟁에 내몰리며 무한생존방식에 길들어져 가는 다음 세대들의 우울한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 외로울 수밖에 없는 서로를 진정한 주체로 받아들이고 함께 보듬고 사랑할 마음의 문을 열 때만이 이 친밀한 타인을 통해 지금 우리의 메마른 이 인간관계를 변화시키지 않을까 생각한다.

“외로움은 우리를 죽이지만, 친밀함은 우리를 소생시킨다’는 한 심리학자의 말을 새삼 떠올려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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