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사라진 숲에서 전하는 ‘ 나’의 안부

김진형 2023. 6. 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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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출신 최계선 여섯 번째 시집
동물시편 이후 자유로워진 소재
이스터섬 문자 ‘롱고롱고’ 착안
생태·선불교·고대문명 등 사유
우주·생명 관계 존재 의미 인식
▲ 지난 4월 몽골을 방문한 최계선 시인은 “우리가 아무 때나 쓰고 흘려버리던 자연에 대하여 갈수록 생각이 많아진다”고 했다.

'롱고롱고’는 18세기 남태평양 이스터섬에서 사용됐다고 추정되는 문자다. 원주민들의 전멸로 이 문자를 읽는 방법은 소실됐다. 이스터섬의 초대 왕인 호투 마투아가 “우리들의 말은 잊히고 아무도 읽을 수 없게 될 것이다”고 예언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춘천 출신 최계선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제목 ‘롱고롱고 숲’은 이상하게도 ‘울고울고 숲’으로 읽혀진다. ‘롱’이라는 글자를 180도 뒤집으면 ‘울’이 된다. 인간의 환경 파괴로 숲이 울고 있다는 의미일까. 지구는 거대한 숲의 형상이고, 인간의 삶은 울음으로 태어나 숲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시집은 자연의 순례자로서 더 깊은 숲길을 따라가는 1부 ‘숲에서 숲속으로’, 열매를 통해 우주를 고찰하는 2부 ‘열매행성’, 불교적 세계관을 엮은 3부 ‘달마를 마중하다’로 구성됐다. 시인은 1993년 두 번째 시집 ‘저녁의 첼로’ 이후 20여년간 시를 놓았고, 생태시 세계를 본격적으로 구축한 동물시편 시리즈를 통해 시의 길을 다시 찾았다. ‘동물시편’이 세계를 탐구하는 저변이자 대화였다면, 소재의 자유로움을 덧댄 이번 시집은 우주와 생명의 관계 속 존재론으로 나아간 듯 싶다. 생태시의 계열의 작품부터 선시의 결까지 감출 것 없이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쓰여진 시집이다.

서시 격으로 쓰인 ‘숲에서 숲속으로’는 “부득이 집을 나서네”라고 전하는 고백이다. 별다른 짐 없이 먼 길을 떠나는 시인이 무얼 찾고 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너무 깊은 숲으로 들어가 곰을 만날 수도 있지만 “걱정하지 말게나”라고 소식을 나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떠나야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시인의 마음은 알고 있다. 그것은 ‘오랑우탄’이 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오랑우탄은 말레이시아어로 ‘숲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키워드를 꼽자면 ‘나무’다. 숲을 구성하는 각 개체의 모습을 표현하는 동시에 과거부터 이어온 인류의 공통 주제인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시 ‘나무인간의 염불’에서는 얼음낚시터에 나무처럼 앉아 각자의 구멍을 들여다 보며 “나무…… 무엇일까”라고 염불을 읊는 모습이 그려진다. 시 ‘달마를 마중하다’에서 숯가마 찜질방의 달궈진 ‘참나무’는 ‘참나’의 중의적 해석으로도 보여지며 ‘참나’의 ‘무(無)’를 인식하게 만든다. 이 와중에 ‘태양의 숲’에서 “나무에 기생해 사는 사람”들은 제 숲을 갈아치운다.

최계선의 시편 중 드물게도 청년시절 사회적 현상을 암시한 시가 눈에 띈다. ‘호루라기 새’는 “무엇이든 멈추게 걷게 뛰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아무 일 없이 무시하면 구경거리일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래된 기억은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잃어버린 고대 문명, 공백의 역사에 대한 물음도 주요한 맥락을 차지한다. 이스터섬의 롱고롱고 문자와 모아이 석상, 잉카의 돌벽 유적인 삭사이와만, ‘고무인간’이라는 뜻을 지닌 아메리카의 올멕 두상, 튀르키예의 지하도시 데린쿠유 등이 그렇다. 나를 제대로 알기도 어렵고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은데, 그저 궁금한 것은 늘어만 간다.

시 ‘그게 한 이슬의 밤이고 아침’은 2부 ‘열매 행성’의 심상을 대변한다. “거미의 아침 과일이/거미줄에 열린 이슬이듯/모든 열매 안에는/개울과 텃밭과/구름과 햇살의/만유가 있으니/(중략)/행성 항성 은하 은하군 은하단 모두/포도알이니 우주의 열매들이니”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인연으로 얽힌 생명의 이슬은 우주의 열매와 같다. 무한히 거대하거나 작은 우주의 열매들은 “뱅글뱅글 돌아”가며 다시 싹 틔우고 줄기를 뻗는다. 혼자서 놀 수 없는 ‘시소(seesaw)’의 반복되는 문장 놀이도 압권이다. “올라갔다/내려갔다/눈앞의 당신은 현재의 꿈이거나/과거에 떠났던 그 모습이거나” 등의 형태로 현재와 과거 사이를 오간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나’의 모습은 오직 과거만을 비춘다.

시인은 지난 4월 롱고롱고 숲 대신 몽골의 숲을 다녀왔다. 그곳의 초원은 한 때 숲이 울창했던 이스터섬의 전철을 밟듯 인간의 행위로 인해 사막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수만명의 승려가 숙청되고 고유 언어조차 잃어버린 현대사도 있었다. 바람이 조각한 ‘모아이’를 닮은 바위들은 아득히 오래전 문명 이전의 시간을 암시할 뿐이었다. 숲이 더는 ‘인간기피증’을 겪지 않도록,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숲 속 스승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다. 숲이 우리를 허락한다면. 김진형

숲에서 숲속으로-최계선

부득이 집을 나서네, 내 생각은
이끼 담요를 걸친 바위들과
길 없는 길을 막는 미끄덩한 통나무 숲을
무작정 헤집고 있다네
가을의 전설처럼 곰을 만나거나
의문의 목덜미가 끄잡혀 나뭇가지에 매달리더라도
칡덩굴 붙잡고 바둥바둥 힘써 볼 요량이니
그리 알고

걱정하지 말게나, 내 담당의인
개구리와 방아깨비 개미 가재 박새에게
원주민들에게, 내 고질병인
인간기피증과 부정적 견해에 대해서도
상담받을 예정이니

나중에 얘기 나눔세, 내가 무얼 찾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뱀 허물에 코를 박고 넘어져
뭔 냄새를 맡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몸 안의 내 껍질 뜯어내며 하염없이 다니고는 있으니
이게 회피나 방편이 아님은 분명한 듯하네

숲에서 숲속으로
나무 뒤에 서 있는 나무로
자연의 순례자로, 나는
여행 다녀도 좋을 사람으로
남고 싶을 뿐이라네
소식 또 전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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