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e북 해킹
책 빌려간 이는 곧잘 돌려주길 잊는다. 두어번 재촉하다 포기하기 일쑤다. ‘책을 빌려주는 것도, 빌린 책 돌려주는 것도 바보’라는 말도 있다. 책을 통한 지식 전파가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되고, 좋은 책일수록 필요한 이들이 많이 읽으면 좋다는 생각이 있어서 일 게다.
그래서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식의 보고인 도서관은 늘 책도둑에 시달렸다. 최초 기록은 페르시아인이 람세스 2세 도서관에서 파피루스를 훔친 일이다. 바르셀로나 ‘산 페드로 수도원 도서관’에는 옷자락에 숨겨 책을 빼돌리는 성직자들을 겨냥해 “지옥의 불길이 그를 영원히 삼키게 되리라”는 경고문이 걸려 있다. 19세기에는 중동 지역 도서관을 찾은 서방 학자들의 희귀본 도둑질이 성행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책을 야금야금 찢어가는 이들을 막으려고 자료 이용 전후에 책 무게를 달기까지 했다고 한다. 유교 문화권은 서구보다도 책도둑에게 너그러운 편이다. 중국인들은 “책 훔치는 것은 아름다운 범죄”라고까지 했다.
읽으려고 훔치면 그나마 양반이다. 대공황 시기 뉴욕 도서관은 빌린 책을 중고서점에 팔아 끼니를 얻으려는 가난한 이들로 북적였다. 책의 내용보다는 소유 자체에 집착하는 ‘장서광’은 때론 범죄까지 저질렀다. 1813년 살인 혐의로 체포된 독일 목사 티니우스는 6만권에 달하는 도서 구입비용을 마련하려고 범행을 저질렀다. 미국인 블룸버그는 20년간 북미 도서관 250여곳에서 현 가치로 100억원이 넘는 도서 2만권을 절도했다가 1990년 덜미를 잡혔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전자책(e북)이 해킹돼 베스트셀러를 포함한 5000여권이 유출됐다. 100만권을 탈취했다고 주장하는 해커는 서점 측에 35억원 상당의 비트코인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보기 편한 e북이 한 방을 노리는 해커의 타깃이 된 것이다. 사실이라면 국가 간 전쟁에서나 가능한 규모의 도서 탈취이고, 무한복제가 가능한 e북 특성상 유례없는 수준의 피해가 우려된다. 책도둑은 책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지만, 디지털 시대의 e북 해커는 출판 생태계를 뿌리째 위협할 수 있다. 지식·문화·생각을 교류하는 전자책이 범죄 인질이 되지 않도록 유통 플랫폼 보안을 강화해야 한다.
최민영 논설위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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