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기를 빼앗긴 어린이 트로트 가수들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
이 그림은 16세기 이탈리아 여성 화가 라비니아 폰타나(Lavinia Fontana)의 가족 초상화다. 볼로냐의 저명한 화가 프로스페로 폰타나의 딸로 태어난 라비니아는 여성이 예술가가 되기 어려운 시대에 아버지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직업적인 전문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볼로냐 상류계층은 너도나도 그녀에게 그림을 의뢰하려고 경쟁했다. 교황 클레멘트 8세의 초청으로 로마로 이주한 이후에는 성당의 제단화와 초상화를 그리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특히 폰타나는 섬세한 세부 묘사의 초상화로 유명했다.
이 작품에서도 인물들이 입은 의복이나 액세서리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림 속 귀부인은 초상화가 완성된 지 일 년도 안 돼 열아홉 번째 아이를 낳은 후 37세에 사망했다. 그림에서는 건강해 보이지만 반복되는 임신으로 많이 지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값비싼 의복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표정이 밝지 않다. 한편 어머니와 아이들의 복장이 똑같다. 그들은 모두 금실, 은실로 화려한 수를 놓은 비단옷인 브로케이드를 입고 있다. 손이 보이지 않는 한 소년을 제외하고 다들 진주 목걸이, 금귀걸이, 팔찌, 반지 등 액세서리까지 하고 있다. 아이들은 왜 이렇게 불편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일까?
어린이가 왜 어른처럼 옷을 입었을까?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격식이 있는 화려한 의상을 입혔다. 신체적 발달을 고려하지 않고, 아동들에게 성인과 똑같은 옷을 입힌 것이다. 아이들도 목에 뻣뻣한 러프가 달린 옷을 입었다. 심지어 여아 복식의 경우는 활동하기 불편한 속치마를 여러 겹 넣은 크리놀린 스커트에 가발과 코르셋까지 착용하는 성인복의 축소판이었다. 이것은 당시 사회가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고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
중세 유럽 어린이는 일종의 '작은 어른', 즉 키와 몸집만 작은 성인으로 취급되었다. 성인 옷과 아이의 옷은 단지 사이즈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다를 게 없었다. 서민층 아이들은 귀족 어린이처럼 불편한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어린이로 다루어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이들만의 놀이문화도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서너 살이 되면 어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밤늦게까지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 사이에 끼어 카드놀이나 주사위놀이를 했고, 심지어 돈을 걸고 도박을 하거나 선술집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놀기도 했다.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성과 관련된 음담패설과 농담도 거침없이 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아동기에 대한 개념이 서서히 나타났다. 어린이에게 양육과 보호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었고, 나름의 인격과 개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18세기 말이 되면, 아동의 신체적 특성에 맞춰 좀 더 편하고 캐주얼한 아동복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는 사상이 아동을 위한 의복에 반영된 것이다.
트로트 부르는 아이들
그러나 시대적 역행 현상처럼 현대에도 성인 세계의 모방이 엿보이는 아동복이 여전히 생산되고 있다. 다음 아동용 의류업체 광고의 어린이들을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든다. ‘비앙카 데글리 우틸리 마셀리와 여섯 아이’의 어린이들처럼 작은 몸이 어른의 복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사진 속 어린이들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화이트칼라 어른을 모방하고 있다.
트로트를 부르는 어린이는 어떤가? 요즘 TV에서 흔히 6~8세가량의 어린이나 10대 소년소녀들이 간드러진 창법으로 트로트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표정과 몸짓, 의상, 무대 매너 역시 성인 가수를 판박이처럼 흉내 낸다. 지켜보는 어른들은 격하게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그들이 노래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는 성인들의 모습 역시 근대 이전 인류가 어린이를 대하던 태도와 비슷하다. 어떤 점에서 일까? 아이를 아이로 보지 않고 어른의 축소판으로 본다는 것이다. 트로트 신동뿐일까? 일부 국가에서는 여전히 어린이 미인선발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우승하기 위해 이브닝드레스에 인조 속눈썹을 단 짙은 화장에 심지어 보톡스 시술이나 성형까지 한다.
인류의 역사를 권력관계의 측면에서 본다면 기득권층이 피지배층을,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고 착취해 온 불평등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른이 어린이를 대해 온 태도 역시 강자와 약자 간의 본질적인 권력 구조와 너무나 닮아 있다. 어른은 신체적, 지적 우위와 경제적 힘을 가진 강자의 입장이고, 어린이는 이런 면에서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다. 트로트 신동을 발굴하는 TV 프로, 아동복 업체의 광고, 어린이 미인대회 등은 어른들이 자신들의 오락과 즐거움을 위해 만든 것들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너무도 빨리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 아이들은 아동기의 순수함과 즐거움을 빼앗긴다. 만약 어린이 스스로가 즐겁게 트로트를 부르고 미인대회에서 우승하기를 소망한다면 그루밍(grooming)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700만 년 전 침팬지에서 갈라져 나온 20여 종의 인류가 한동안은 지구에 공존했지만 결국 모두 멸종했고 우리 호모 사피엔스만이 살아남았다. 인류학자들은 발달한 뇌, 서로 협동하는 사회성, 길어진 유년기 등을 그 이유로 꼽는다. 특히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영장류나 인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유년기 동안 놀이를 하면서 창의성을 기르고 뇌를 발달시킴으로써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이렇듯 아동기의 중요성은 인류학적으로도 설명된다.
그러나 원시시대에서 근대 이전에 이르기까지 우리 종이 어린이로 산 기간은 대체로 매우 짧았다. 평균 수명이 짧아 빠르게 성장하고 번식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그런데도 아동기가 다시 짧아지고 있다. 애어른을 의미하는 어덜키드(Adulkid)란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adult'와 'kid'를 결합한 것으로, 어른같이 말하고 행동하며 어른의 세계를 따라 하는 어린이를 말한다. 인터넷 시대에 사는 우리 아이들은 성인문화를 비롯한 수많은 정보에 접촉할 기회에 노출되면서 점점 조숙해지고 있다. 지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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