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능력을 삽니다
[김상균의 메타버스]
[메타버스] 김상균 | 인지과학자·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스위스 기업 오스트롱이노베이션은 올가을 새로운 안경을 발표한다. 안경의 이름은 리라이다. 겉보기는 일반 안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무게도 58g이어서, 다른 안경과 비슷하다. 그런데 충전해서 쓰고 다니면 색다른 기능을 제공한다. 안경 렌즈에 길 안내가 뜨고, 내가 누군가와 만나서 나누는 대화를 자동으로 요약해서 저장해 준다. 외국어가 들리면 자동으로 번역해서 렌즈 위에 내가 선택한 언어로 보여준다. 이런 안경을 스마트 글래스라고 부른다.
여러 외국기업이 이런 안경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 상대와 대화하는 맥락에 맞춰서 부가정보를 띄워주는 기능도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주제를 놓고 상대와 토론을 하는데, 내가 이런 안경을 착용하고 있으면, 내 안경이 상대의 주장을 분석해서 그에 걸맞은 반박 논리를 내게 제시해 주는 식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당신이 아닌 상대가 이런 안경을 착용하고 있다. 상대가 그런 안경으로 길 안내를 받고, 당신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지만, 당신의 말을 잘 알아듣는 상황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상대가 당신과 중요한 토론, 협상하는 중에 이런 안경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떤가? 반칙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상대가 발휘하는 능력에 그의 노력이 반영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는 로봇, 생명공학, 인공지능, 메타버스 등의 기술을 통해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확장하려 시도하고 있다. 인공진화를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자연의 일반적 진화와 사뭇 다른 점이 있다. 개인의 상황에 따라 이런 인공진화를 수용하는 시기, 수준에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취향, 철학 등도 중요하겠으나, 무엇보다 개인의 경제력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리라.
앞서 상황을 놓고 보면, 주머니가 두둑한 이는 다양한 인공진화를 수용해 더 편리하고 유리하게 사회적 활동을 풀어가겠으나, 그렇지 못한 이들은 불균형한 상황을 그저 감수해야 할 뿐이다. 개인의 선택, 노력이 아닌 경제력에 따라 능력이 결정되는 상황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 그런 상황이 아니냐며 한탄할지도 모르겠다. 청소년 자녀 사교육비를 보면, 소득 상위 20% 가구가 하위 20% 가구의 8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과는 조금 다르다. 돈을 쏟아부어도, 개인의 노력이 전혀 없다면 성적은 올라가지 않는다. 그런데 기술, 기계를 통한 육체와 정신의 확장 방향은 점점 더 개인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흘러간다.
거저 부자가 된 것은 아닐 테니, 부자가 기술이나 기계를 구매해서 편하게 똑똑해지거나 건강해지는 것을 불공정하거나 부당하다고 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참 씁쓸하고 불편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돈이 부족한 게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모든 게 돈의 가치로 치환해 거래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개인의 능력까지 너무도 적나라하고 직선적으로 돈과 교환되는 게 아닌가 해서다.
인류는 인공진화기에 진입했다. 사피엔스가 자연적으로 진화해 온 30만년 역사가 무색하게 인류는 최신 기술과 기계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숨 가쁘게 진화시키고 있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설정처럼, 우주에 인류보다 훨씬 더 앞선 지적 문명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문명에도 아마 지구의 인류와 비슷한 시기가 있었을 테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선택과 조율을 통해 인공진화를 이끌어갔을까? 그리고 만약, 그들이 따듯한 마음으로 지구를 관찰한다면, 현재 인류의 인공진화를 바라보며 무엇을 우려하고 있을까? 잠시 인공진화의 달리기 속도를 늦추고 숨을 고르며,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를 돌아보면 좋겠다. 넷플릭스 드라마 <택배기사>와 같이 뿌연 먼지로 가득한 세상에서 거대한 장벽의 안과 밖으로 갈라져 살아가는 시대와 마주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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