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1급 고위 공무원 인사 검증 실패, 책임은 어디에?

김지욱 기자 2023. 6. 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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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지난달 31일) 농림축산검역본부 박봉균 본부장이 7년 4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습니다. 지난 2016년 개방직 공무원으로 시작해 임기를 3차례 연장했습니다. 정부 1급 고위 공직자 중엔 '장수' 공무원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임기 중이던 지난 2021년, 박 전 본부장이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재직 당시 자신이 지도했던 논문의 저자 순서를 부당하게 바꿨다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즉시 두 차례 박 전 본부장과 사건의 당사자들을 불러 조사했습니다. 서울대가 파악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박 전 본부장은 임기 전인 2015년, 제자들이 돼지 가검물에서 바이러스를 검출해 특성을 연구하는 논문 작성에 지도 교수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이 논문의 기획부터 작성, 출간까지 주도했던 건 연구원 정 모 씨였습니다. 그런데 박 전 본부장의 지시로 연구에 사용된 돼지 가검물을 제공한 이 모 연구원이 논문의 공동 제1저자로, 심지어는 정 씨 보다 선행 저자로 등재됐습니다.

위원회는 이러한 박 전 본부장의 행위를 <서울대학교 연구진실성위원회 규정> 제6조의 "고의로 기여도에 관한 판단권을 일탈‧남용하여 기여도에 위반해 저자 순서를 정하는 행위"로 판단하고, 위반의 정도가 '비교적 중대'하다고 결정문에 적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박 전 본부장에게 '경고' 조치를 내리고, 논문 저자 순서도 바로잡도록 했습니다.

검역본부장과 동물 의약품 제조업체 대표 간 '검은 연결고리'

그런데 SBS 취재 결과, 박 전 본부장과 이 씨 사이에 '수상한 인연'이 발견됐습니다. 이 씨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국내 상장 동물 의약품 제조업체는 지난 2014년 '아들의 스승'인 박 전 본부장 연구팀에 용역을 맡겼습니다. 이듬해인 2015년 박 전 본부장의 '논문 저자 비위 행위'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2016년에 이 씨는 이 논문으로 대학원을 졸업했고, 박 전 본부장은 검역본부장으로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단독] '1급' 본부장님의 수상한 인연…정부에선 몰랐다 (2023.05.09 8뉴스)
[ 원문 링크 : https://news.sbs.co.kr/d/?id=N1007185130 ]

같은 해 박 전 본부장이 회장을 맡고 있던 대한수의학회에서는 '대한수의학회 2016년도 차세대과학자 상'에 이 씨를 선정했습니다. 끝난 줄 알았던 인연은, 지난해 말 이 씨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품질 관리 모범 업체로 선정해 검역본부장 명의로 상을 주기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사안의 문제는 단순히 1급 기관장의 비리가 아닙니다. 우리 정부의 고위 공직자 검증 시스템에 생긴 구멍을 봐야 합니다.

"서울대에서 알려주지 않아 몰랐다"…검증 실패 책임은 어디에?

현행 제도 상 각 부처의 기관장 인사 검증은 해당 부처에서 담당합니다.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의 결정이 있고, 박 전 본부장은 두 차례 임기가 연장됐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박 전 본부장의 '연구윤리 위반 행위'가 걸러지지 못했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 농림축산검역본부장 공개모집 요강

<농식품부 '농림축산검역본부장' 공개모집 요강>에 따르면 서류전형에선 인사 변동 사항이 포함된 경력증명서를 제출받고, 면접에선 '공직가치와 윤리'를 검증합니다. 임기 연장 시에도 당연히 후보자에 대한 인사 검증은 필수입니다.

이에 대해 농식품부 관계자는 SBS 취재진에 "관련 사실을 서울대나 본인이 통보하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었고 임기 연장 과정에서 검증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또, "논문 저자 지적 문제가 본부장 업무 수행과는 관련이 없다"며 "모범 업체 선정에 대해서도 검역본부는 외부 위원이 정량적으로 평가했을 뿐"이라면서 유착 의혹을 부인했습니다.

박 전 본부장에 경고 조치를 내린 서울대는 "교원 개인의 징계 및 경고 조치를 정부 기관에 알려줄 의무와 규칙이 없다"면서 "해당 부처에서 문의해 왔으면 제공을 검토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고위공무원단 임용 사항을 처리하는 인사혁신처는 "1차적인 서류 절차만 준비할 뿐, 심층 면접과 합격자 결정 여부는 해당 부처에서 관리한다"며 발을 뺐습니다.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텍사스 존(Texas zone) 막으려면

지난달 중순, SBS는 검역본부장의 비리와 정부 부처의 인사 검증 공백을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보도가 나간 뒤에도 농식품부는 "검역본부장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징계 여부 등을 검토할 실익이 없다"며 박 전 본부장의 비리 행위가 직무와 관련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결국 박 전 본부장은 어제 무사히 남은 임기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정작 오늘 새로운 검역본부장은 임명되지 않았습니다. 농식품부는 지난 2월부터 새로운 검역본부장에 대한 공모 절차에 돌입했지만, 최종 후보에 올랐던 3명의 후보자가 지난달 모두 최종 단계에서 인사 검증 결과 부적격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박 전 본부장의 비리가 형법상 범죄에 해당하진 않지만, 우리 사회가 기대하는 윤리 수준이 높아진 만큼 더 치밀한 검증이 필요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법무법인 동인의 허인석 변호사는 "과거에는 공무원의 형법 상 범죄도 해당 기관에 알릴 의무가 없었지만, 사회가 변화하면서 관련 법이 생긴 것"이라면서 "비록 수사가 아니다 하더라도 공무원의 윤리성과 관련된 중요 사항에 대해서는 상관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의무화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야구 용어 중 '텍사스(Texas) 안타'라는 말이 있습니다. 막히거나 빗맞은 타구가 내야수를 넘어가, 전진하는 외야수도 잡을 수 없는 사각 지점에 떨어진 안타를 의미합니다. 박 전 본부장의 인사 검증은 농식품부도, 서울대도, 인사혁신처도 모두 검증해내지 못했습니다. 고위 공무원의 인사 검증 영역이 '텍사스 존'이 되지 않도록 각 기관 간 소통과 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 의식이 필요해 보입니다.

김지욱 기자wook@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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