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땅에 갇힌 난민 청년, 태권도가 그를 세상과 이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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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이 잘못된 모양인지 출발이 늦었다.
부랴부랴 코트에 오른 그의 상대는 세계태권도연맹(WT) 남자 63㎏급 랭킹 16위의 카를로스 나바로(29·멕시코). 17살 때부터 세계 무대에서 성인 대회를 뛰어온 베테랑이었다.
알고타니는 아즈락 난민 캠프 출신 태권도 선수다.
그의 이야기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분투해온 어느 난민 소년의 투쟁담인 동시에 세계태권도연맹의 난민 지원 정책이 거둔 결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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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63㎏급 에흐야 알고타니 인터뷰
전달이 잘못된 모양인지 출발이 늦었다. 설상가상 교통 체증이 겹쳤다. 에흐야 알고타니(20)는 경기 시작 30분 전에야 간신히 경기장에 도착했다. 몸을 풀고 환복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부랴부랴 코트에 오른 그의 상대는 세계태권도연맹(WT) 남자 63㎏급 랭킹 16위의 카를로스 나바로(29·멕시코). 17살 때부터 세계 무대에서 성인 대회를 뛰어온 베테랑이었다. 알고타니는 1라운드에만 네 번의 다운을 기록하면서 한 점도 내지 못했다. 0-12. 그러나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너무 소중한 경기였다.
2라운드. 반격이 시작됐다. 12초 만에 알고타니는 달려드는 상대 몸통에 왼발 카운터를 적중, 2점을 선취했다. 장외와 다운, 몸통 공격으로 다시 4점을 내줬지만, 50초께 왼발을 휘둘러 이번에는 머리(3점)를 때려냈다. 이 공격은 그의 마지막 득점이 됐다. 분전 끝에 알고타니는 6-12로 2라운드도 내줬다. 라운드 점수 0-2 패. 유니폼에 국가 이니셜 대신 태권도박애재단(THF)을 새기고 뛴 난민 팀 선수 알고타니의 생애 첫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데뷔전은 6득점으로 마무리됐다.
알고타니는 아즈락 난민 캠프 출신 태권도 선수다. 요르단 북동부 시리아와 접경지대에서 90㎞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아즈락 캠프에는 약 4만명의 난민(2022년 10월 기준)이 살고 있다. 대부분 시리아 출신이다. 알고타니 역시 8살 때 부모와 함께 이곳으로 넘어왔다.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해다. 멀쩡한 집을 놔두고 왜 ‘이사’를 떠나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초기에는 텐트에서 지냈고 지금은 부모님과 형제 여섯(남자 4명, 여자 2명)이 캐러밴 두 대에 함께 산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의 폭이 너무 컸다. 지난 30일(현지시각)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크리스털홀에서 만난 알고타니는 “‘언제쯤 이 삶을 벗어날 수 있을까’ 매일 밤 혼자 되물었다”라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응답은 없었다. 대신 그는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태권도였다. 2017년 친구를 따라 태권도 도장에 따라갔다가 하얀 도복과 날렵한 동선으로 이루어진 무예의 세계에 빠졌다. 덜컥 ‘태권 키즈’가 된 알고타니는 입문 8개월 만에 검은 띠를 따냈다. 아즈락 캠프의 두번째 유단자였다.
그의 이야기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분투해온 어느 난민 소년의 투쟁담인 동시에 세계태권도연맹의 난민 지원 정책이 거둔 결실이기도 하다. 조정원 연맹 총재의 아이디어로 2016년 출범한 태권도박애재단은 같은 해 4월 아즈락 캠프에서 태권도 교육을 시작했다. 임시 공동 건물에서 30명 남짓한 청소년과 함께 출발한 사업은 말끔한 태권도센터(2018년 완공)가 들어선 지금, 100여명의 수련생이 북적이는 명문 도장이 됐다. 그간 아즈락 캠프에서 배출된 유단자는 70명에 이른다.
알고타니는 “태권도는 나와 친구들, 다른 아이들의 삶을 크게 바꿨다”라면서 “나는 태권도를 통해 세상과 만났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즈락 캠프 출신으로는 처음 세계선수권대회를 치렀다. 12년 전에는 영문 모를 불안과 겨뤄야 했지만, 이제는 세계의 강호를 앞에 두고 당당히 자신의 한계에 맞선다. 이제 그에게는 명확한 꿈이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난민 장학생이기도 한 알고타니는 “파리로 가는 기회를 잡기 위해 할 수 있는 전부를 쏟을 것”이라고 했다.
첫번째 국경을 넘었을 때는 피란길이었지만 두 번째 국경을 넘는 길은 출정식이었다. 첫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보여줬듯 그는 1라운드보다 2라운드에 강한 선수다. 태권도는 알고타니의 한계를 바꿨고 알고타니는 아즈락 캠프 후배들이 꾸는 꿈의 한계를 바꿀 것이다. 그의 세 번째 라운드를 기다린다.
바쿠/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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