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구원투수는 왜 항상 여성 CEO일까[홀리테크]

박건형 테크부장 2023. 6. 1.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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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는 린다 야카리노를 유리 절벽으로 떠민걸까
소셜미디어(SNS) 트위터의 새 최고경영자(CEO)로 임명된 린다 야카리노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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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일론 머스크 트위터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트위터 팔로어들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머스크가 트위터에 황당하거나 파격적인 트윗을 올리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 트윗이 유독 관심을 끈 것은 본인의 거취를 직접 물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내가 트위터 CEO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참여자의 57.5%가 ‘그렇다(Yes)’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이 설문은 현실이 됐습니다. 지난달 11일(현지 시각) 머스크는 “트위터의 새 CEO를 고용하게 된 것을 알리게 되어 흥분된다”면서 “그녀는 약 6주 후에 일을 시작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트위터는 물론 테슬라 투자자들도 환호했습니다. 머스크가 본업인 테슬라 CEO에 전념하기를 바라왔기 때문입니다. 머스크가 인수한 이후 망가진 트위터에도 호재라는 평가가 잇따랐습니다. 머스크의 끊임없는 기행과 사용자를 무시하는 각종 정책 남발로 트위터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한 뒤 기존 상위 100개 광고주 가운데 37곳은 올 1분기 동안 광고 지출을 전혀 하지 않았고, 24곳은 광고 지출을 80% 이상 줄였습니다. 아시다시피 트위터는 기본적으로 무료 서비스로, 광고가 수익의 대부분입니다.

머스크가 말했던 ‘그녀’의 정체는 NBC유니버설 광고·파트너십 대표 린다 야카리노였습니다. 광고 위기를 겪는 트위터와 머스크가 광고 전문가를 영입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굳이 ‘여성’을 선택한 데 대해 실리콘밸리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랐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트위터 CEO 엘론 머스크(가운데)가 2023년 4월 18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비치에서 열린 파서블 마케팅 콘퍼런스에서 NBC유니버셜의 글로벌 광고 및 파트너십 회장인 린다 야카리노와 대화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유능한 리더십이 관건 아니다?

야카리노는 광고계에서 ‘벨벳 해머(Velvet Hammer)’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벨벳 해머는 남자처럼 터프하게 굴지 않으면서,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맡은 임무를 완수하는 여성 리더를 뜻하는 말입니다. 블룸버그통신은 “야카리노는 광고 업계에서 분명히 아주 유능한 사람으로 알려졌다”면서 “하지만 직장문화 연구자들은 야카리노가 이른바 ‘유리 절벽(glass cliff)’으로 불리는 기술 회사의 패턴에 빠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유리 절벽은 직장에서 여성이 받는 차별의 의미하는 유리 천장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유리 천장은 직급이 높아질수록 여성이 줄어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차별)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반면 유리 절벽은 기회는 주지만 실제로는 마치 절벽처럼 추락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뜻합니다. 포브스에 따르면 유리 절벽은 영국 학자 미셸 라이언과 알렉스 하슬람의 연구에서 비롯됐습니다. 저명한 남성의 명성을 실패로 더럽히지 않기 위해 저명한 여성을 택하는 것으로 사실상 성차별이라는 겁니다. 물론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하면 영웅이 됩니다. 하지만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야후의 희생양 메이어

보그 표지 모델이 된 마리사 메이어 야후 CEO

유리 절벽은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현실이기도 합니다. 2012년 구글 임원에서 일약 야후 CEO로 발탁됐던 마리사 메이어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최고의 검색 엔진이자 포털이었던 야후는 구글과 페이스북의 등장으로 입지가 급속도로 좁아졌습니다. 당시 야후는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임시직을 포함해 모두 남성 CEO가 바뀐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그 중 스콧 톰슨은 이력서 허위 기재로 해고됐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야후의 선택은 실리콘밸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금발의 젊은 여성 메이어였습니다. 메이어는 1999년 구글의 1호 여성 사원이 됐다는 화제성도 갖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반전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죠. 물론 반전은 없었습니다. 야후는 통신회사 버라이즌에 45억 달러에 매각됐고, 메이어는 야후를 정리한 CEO로 기록됐습니다.

메이어 이전에도 유리 절벽으로 떠밀렸던 여성 CEO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한때 전세계 여성들의 롤모델이었던 휼렛패커드(HP) 전 CEO 칼리 피오리나는 포화 상태가 된 PC 시장에서 돌파구를 찾는 임무를 맡고 HP에 영입됐습니다. 피오리나는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컴팩을 인수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결국 영업이익률 폭락의 주범으로 몰려 쫓겨났습니다. 피오리나의 구글 연관검색어에 ‘끔찍한(Terrible) CEO’가 있을 정도입니다. 루슨트 테크놀로지, 필립스 등에서 쌓았던 그의 명성은 잊혀졌습니다.

HP 최고경영자 재직 당시의 칼리 피오리나.

◇여성 CEO의 무덤 HP

1939년 윌리엄 휼릿과 데이비드 패커드가 세운 HP는 실리콘밸리 1호 기업입니다. 캘리포니아 팰러앨토의 차고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두 사람 모두 스탠퍼드대를 졸업했습니다. 지금도 통용되는 실리콘밸리 영웅들의 공식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피오리나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HP는 여성 CEO들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이베이에서 역량을 인정받았던 멕 휘트먼은 2011년 HP CEO에 임명됩니다. 휘트먼은 연구·개발(R&D) 조직을 쇄신하고 PC를 부활시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HP 주가는 계속해서 추락했고, 2013년 블룸버그의 ‘가장 부진한 CEO’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씁니다. 2017년 HP에서 쓸쓸히 물러난 휘트먼은 이후 미디어 콘텐츠 앱 퀴비를 설립하며 재기에 나섰지만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를 맡습니다. 현재 휘트먼은 케냐 주재 미국 대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기업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리 절벽에 맞선 투사 앨런 파오

제인 프레이저 씨티그룹 CEO./씨티그룹

드물기는 하지만 유리 절벽에서 살아남은 여성들도 있습니다. 씨티그룹 CEO 제인 프레이저는 압도적인 능력을 앞세워 2019년 미국 대형 은행 최초의 CEO가 됐습니다. 프레이저는 2009년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씨티그룹 계열사인 글로벌프라이빗뱅크 CEO를 맡아 흑자 전환을 이끌었고, 2015년에는 씨티라틴아메리카 CEO로 수익성을 대폭 끌어올렸습니다. 그룹 CEO가 된 프레이저 앞에는 경쟁은행인 JP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점차 벌어지는 격차를 줄여야 하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유리 천장을 깨고 CEO가 됐는데 앞에는 유리 절벽이 있는 상황이었죠. 프레이저는 소매금융을 매각하면서 ‘선택과 집중’하는 전략을 추진합니다. 수익성이 낮은 소매금융 대신 자산 관리와 기업금융에 주력하는 프레이저의 전략은 지금까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인물이 있습니다. 2014년 레딧의 CEO를 맡았던 앨런 파오입니다.

◇야카리노는 누구의 길 걸을까

파오가 레딧 CEO에 임명된 뒤 남성 중심인 레딧의 각종 포럼에는 파오에 대한 혐오 발언이 넘쳐 났습니다. 여성을 믿을 수 없다는 식의 막무가내 공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파오는 이들에 굴하지 않고 리벤지 포르노의 레딧 공유를 금지하는 등 공격적인 정책을 잇달아 관철시켰습니다. 하지만 레딧 이사회는 파오보다는 사용자와 여론을 중시했습니다. 결국 이듬해 파오는 CEO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파오에 대한 사용자들의 혐오는 2012년 한 소송이 발단이 됐습니다. 파오는 당시 이전 직장이었던 투자회사 클라이너 퍼킨스 코필드 앤드 바이어스(KPCB)를 상대로 “남성 엔지니어나 프로그래머가 주류를 이루는 실리콘밸리에서는 능력 있는 여성들이 심각한 차별을 맡으며 성희롱과 성추행에 시달리는 사례가 많다”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레딧 CEO를 맡는 동안에도 소송이 계속됐죠. 2015년에 끝난 소송에서 파오는 결국 패소했지만, 실리콘밸리의 유리 절벽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머스크가 만들어낸 난장판을 정리하기 위해 투입된 야카리노는 과연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극적으로 트위터를 구해낸 여성 리더십이 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아 보이긴 합니다. 한번 영향력이 줄어든 소셜미디어가 부활하는 경우를 본 적은 없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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