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을 왜 할까[서중해의 경제 망원경](14)

2023. 6. 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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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4일 익명의 기부자가 충북 영동군 영동읍사무소에 놓고 간 현금 100만원과 손편지 / 충북 영동군 제공



가정의 달을 맞아 기부 소식이 언론에 많이 보도됐다. 연예인과 운동선수 등 유명인들과 기업, 사회단체 등에서 어린이병원이나 양육시설, 장애인 시설 등에 기부금을 전달했다. 익명의 기부 행렬도 이어지고 있다. 충북 영동지역에서는 익명의 기부자가 5만원권 20장이 담긴 봉투 안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의 도움만 받아봤지 도움을 준 적이 없다. 가정의 달을 맞아 생활이 어렵고 외로운 분들께 도움이 됐으면 한다’는 내용의 손편지를 함께 담아 전달했다고 한다. 영동읍은 올해 ‘사랑나눔 행복나눔 릴레이 기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지난 3년여 동안 코로나19로 전 세계에서 약 69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와중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일반인들의 봉사활동과 기부행위가 늘어났다. 세계기부지수(World Giving Index)에 따르면 2019년 51%였던 이방인에 대한 도움 활동이 2021년 62%로 늘어났다. 기부행위는 28%에서 35%로 늘어났고, 봉사활동 참여는 19%에서 23%로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2022년 조사 결과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코로나19 이전보다는 분명 높으리라 예상해볼 수 있다. 유사 이래로 인간은 위기에 닥치면 서로 도왔다.

합리성을 넘어서는 인간의 행위

인간은 왜 자신의 돈과 시간을 어려운 처지에 있는 타인을 돕는 데 쓰는 걸까. 왜 위기가 닥치면 평시보다 더 서로를 도울까. 이 질문은 경제학 방법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고 전제하면, 자선행위가 공동체의 이익 전체를 증가시키고 이는 돌고 돌아 자신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 설명은 합리적 선택이란 관점에서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려는 주류 경제학의 방법론을 자선행위에 적용한 것이다. 이 합리적 선택에 근거한 설명은 그러나 자신의 자선행위가 돌고 돌아 ‘나의 복지’ 증진으로 명백하게 귀결되지 않는데도 자신을 희생하는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 코로나19 초기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치료 현장에 자발적으로 뛰어든 간호사와 의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합리성과 이기심만으로는 이들의 행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자선행위에 대해 현재 경제학에서 널리 수용되고 있는 설명은 ‘불순한 이타심(impure altruism)’ 이론이다. 순수한 이타심은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하므로 자기만족과는 무관하지만, 불순한 이타심은 타인을 돕는 행위를 통해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자기만족을 느낀다고 본다. 순수한 이타심은 타인의 행복 증진이 목표지만, 불순한 이타심은 나의 행복 증진이 궁극적인 목표다. 불순한 이타심 이론은 봉사활동, 기부행위, 자선단체의 존재 이유 등을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환경보호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례를 보자. 나는 여가를 활용하고 금전적인 기부를 한다. 환경보호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주변의 환경을 보호하고 지구온난화 대응에 아주 작지만, 기여를 한다 싶어 만족감을 느낀다. 이처럼 개인적 동기에서 출발하지만,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활동이 주위에 다양하게 퍼져 있다. 등산로 주변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산악회의 활동이나 이웃돕기 운동을 하는 민간단체, 노숙자들에게 한 끼 음식을 대접하는 사회단체의 활동 등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 가능하다.

지난 1998년 1월 시민들이 금 모으기 행사에 동참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순수하건 불순하건 이타심 이론은 궁극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 점에서 이타심 이론과 이기심 이론은 같은 프레임 안에 놓여 있다. 개인을 둘러싼 관계, 가족, 내가 속한 사회, 국가 또는 인류 전체라는 거대한 연결망, 즉 공동체라는 맥락이 여기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다를 뿐이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우리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으로 부족한 외환을 보충하는 데 작은 힘이라도 모으고자 했다. 국가 공동체의 위기가 곧 나의 위기라고 인식했다. 외환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한보그룹의 총수 일가는 이때 수천만달러의 비자금을 해외로 빼돌렸다. 나중에 추적 끝에 겨우 환수됐다. 금을 내놓은 일반 국민은 공동체 위기를 극복하고자 개인의 이익을 희생했지만, 외환을 빼돌린 기업인은 위기를 개인의 사익 극대화에 이용했다.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둘 다 ‘합리적 선택’으로 정당화한다면 경제학은 너무 비인간적이다. 인간의 많은 행위는 합리성 프레임을 넘어서 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나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친 군인들이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들의 희생은 이기심 또는 합리성으로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러한 자기희생은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프레임을 넘어선다.

경제학의 한계

경제학의 초석이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만족 극대화에 있는 한, 근본적으로 자기희생을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 대가와 비교적 무관한 자기희생에 높은 사회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이 세상의 행위가 경제적 가치로만 환원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적 가치 외에도 우리가 존중하는 또 다른 가치가 있다. 종교가 이러한 가치 체계의 하나를 제공한다. 개인의 운명을 개인의 선택에 국한하지 않고 공동체로 (나아가 내세로까지) 확장함으로써, 그리고 공동체의 운명을 명시적으로 다뤄 행위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자기희생과 선행 같은 사안에 있어서 종교는 경제학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해준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로서 이처럼 사회계약에는 경제적 요인 외에도 다른 영역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종교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선행을 꼽는다. 기독교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은 예수 당시의 기득권층이었던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일깨우는 경책이면서, 이후 기독교인들의 행동 준칙으로 자리 잡았다. 불교에서 ‘보시’는 모든 행위의 근본이 되는 원대한 실천철학이다. 물질적 도움뿐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안내하는 행위야말로 최상의 보시다. 보시하는 이, 보시받는 이, 보시하는 물건에 대해서조차 분별하지 않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야 참된 보시라고 가르친다. 세속의 일을 합리성이라는 논리로 설명하는 경제학의 관점에서 이 경지는 너무나 아득하다. 보상을 바라고 하는 기부와 선행이라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경제학자의 세속적인 바람이다.

서중해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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