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지역 데뷔’ 넘어 ‘골목 데뷔’
15년 전 시민 공익활동 사례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지역 데뷔’라는 단어가 나왔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 일본에서는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즈음 동네 공원에 산책을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를 ‘공원 데뷔’라고 부른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중장년들이 퇴직 후 동네에 머물 시간이 많아지면서 ‘지역 데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적절한 비유와 통찰력 있는 개념에 큰 영감을 받았다.
요즘 지역 시민단체에서 특강을 해달라는 연락이 자주 온다. 청소년, 여성, 주민운동 각자의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쌓아온 단체들이 새롭게 중장년 정책에 주목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단체들은 공통적으로 젊은 신규 회원 유입은 정체기인 데 반해 오랫동안 활동해온 기존 회원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중장년 당사자로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나아가 다양한 세대를 연결하는 새로운 지역 운동의 방향성을 모색하고, 더 많은 중장년층을 유입하기 위해 이른바 ‘지역 데뷔’ 콘텐츠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불현듯 ‘지역 데뷔’로 인생 2막을 펼친 분들이 떠올랐다. 나는 중장년 교육과정에서 ‘동네 자원 조사’를 과제로 낸다. 퇴직 후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동네에 어떤 공간·사람·가능성이 있는지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실천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퇴직한 최영식씨도 이 과제를 수행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문래동에서 20년 이상 살았는데 동네에 대해 아는 게 없더라고요. 시내로 나가려니 시간도 들고, 돈도 들고. 동네에서 놀아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동네에서 조금씩 사람들을 만나고 텃밭 가꾸기 등 소소한 활동에 참여하고, 자신의 강점인 재무회계 기술로 젊은 예술인들을 돕다 보니 이제는 늘 청춘이라는 뜻의 ‘늘청씨’로 불리며 행복한 동네살이를 하고 있다.
같은 지역에서 노년을 함께 보낼 사람들끼리 ‘작당’을 모색한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도전과 실험이 지치지 않고 지속되기 위해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싶다. 일단 처음부터 너무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계획이 거창할수록 많은 돈과 자원이 필요하고, 반복된 논의로 지치고,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즐겁게 시작했던 일도 감정이 상해 관계가 틀어지는 사례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지역 활동을 반드시 사회 공헌과 연결해야 한다는 강박도 내려놨으면 좋겠다. “정부, 지자체의 신중년 사업의 다수 프로젝트가 사회 공헌활동 일변도로 진행되는 점도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발상 자체가 허위의식의 일종일 수 있다”고 말한 고영직 문학평론가의 말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만났던 ‘니트를 짜는 할머니들의 모임’, 영국 ‘시니어들의 학습공동체 U3A’ 회원들의 모습은 내 마음에 감동으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작당’들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가 즐겁고 행복해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선한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주위로 번지게 마련이다. 또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만을 바라기보다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돈도 냈으면 좋겠다.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하기 어렵다면 먼저 시작한 단체에 후원하는 것도 좋다. 작은 금액이라도 보태는 순간, 자립·자조·연대의 힘은 더욱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경아 사단법인 씨즈 중장년사업본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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