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역사의 무게
역사학 논문의 형식을 익히게 하려고 수업 때 간단한 글쓰기 과제를 내준다. 첨삭 지도를 해서 돌려주면 학생들이 고쳐 오는 것을 몇 번 반복하는 과제다. 빨간 펜을 들고 학생들이 제출한 글을 보노라면 한숨이 나온다. 글쓰기 첨삭 지도를 해본 분들은 다 알 것이다. 이게 얼마나 시간과 힘이 많이 드는 일인지. 더구나 학부생이 제출하는 글은 얼마나 ‘야생적’인지.
손목도 아픈데 빨간 펜 질을 한참 하다 보면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게 있다. ‘나는 한 번도 이런 첨삭 지도 받아본 적이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논문의 내용에 대해 지적을 받은 적은 많아도 글쓰기를 가지고서는 세심한 지도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저 ‘이런 표현은 일본어 문투다’라든가, ‘이런 건 한문 번역투니 풀어 써라’ ‘수동태형 문장은 영어식 표현이니 좋지 않다’는 정도의 얘기가 다였던 것 같다. 그래서 또래끼리 모이면 이런다. “우리가 언제 글쓰기를 각 잡고 배워본 적이 있나. 어깨너머로 익혔지.” 이렇게 이야기하는 마음 한편에는 약간의 잘난 척도 있다. ‘우린 누가 붙잡고 안 가르쳐줬어도 알아서 깨쳤어(그러니 너희들도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니?)’ 같은.
그러다 얼마 전 책 한 권을 읽었다. 1920년대생 국어학자가 우리말 규범을 정립해온 이야기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해방, 한글맞춤법 간소화 논란, 문법 파동 등등을 무심히 따라 읽다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 나의 선생님 세대가 바로 이 우리말 글쓰기 논란의 한복판을 거쳐온 세대라는 것을 말이다. 이분들은 해방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 한국어 교육을 받고, 그 규범을 둘러싼 논란들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며 몸소 한국어 글쓰기를 실천한 세대다. 그러자 이해가 됐다. 이분들이 우리들의 글쓰기를 꼼꼼히 지도해주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변화하는 규범 속에서 당신들 스스로도 시행착오를 겪으며 실천하는 과정 중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눈에는 너무 당연한 소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외국어 문장을 쓰지 말고 한국어 글쓰기를 하라’는 이분들의 지침조차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문투, 일본어투, 영어투가 아닌 괜찮은 한국어 문장 역시 땅에서 솟아난 게 아니었다. 우리가 어깨너머로 보고 익힌 글쓰기는 모두 이분들 세대의 좌충우돌과 실천 속에서 간신히 자리 잡은 것이다.
이를 깨닫고 나니, ‘그럼, 우리 세대는 뭘 해야 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과거 세대가 그 세대의 과제를 충실히 실천하여 성과를 만들었다면, 우리에겐 우리의 과제가 있을 텐데 그게 뭐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마음이 무거워지며 이게 역사의 무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흐름을 이해하며, 현재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그 중요함을 인지하며 느끼게 되는 무거움, 이것이 ‘역사의 무게’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축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 시대에 맞춰 크건 작건 해야 할 임무가 있다. 소박하게는 부모가 나한테 못해준 것을, 나는 내 자식에겐 해주겠다고 맘먹는 것도 ‘역사의 무게’를 깨달은 사람의 결심이라 할 수 있다. 아, 지금껏 역사의 무게는 독립운동을 할 때나 느끼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나도 잘난 척이나 불평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뭔가 각성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찮기만 하던 빨간 펜이 다시 보인다. ‘이전 세대는 맨땅을 다져서 초석을 하나씩 던졌구나. 우리는 거기에 기둥을 세우고 튼튼한 구조를 만들어서, 새로운 세대가 제대로 된 집을 꾸밀 수 있게 해야 하는구나. 이게 대한민국 인구 중 가장 두꺼운 층을 차지하는 우리 세대의 과제네.’ 이제서야 깨닫다니 나도 참 어리광만 부리고 살았다 싶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고 나니 너무 무겁다. 아, 큰일이다.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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