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세상] 산업정책과 성장전략 트릴레마
산업정책의 시대가 부활하고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필두로 세계 주요국이 너도나도 자국 산업 보호 및 육성을 위한 산업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한동안 시장의 효율성과 민간의 자발성을 중시하던 흐름이 크게 뒤틀리고 있는 셈이다.
국가자본주의를 앞세운 중국의 부상과 자원의 무기화를 도모하는 러시아 등 권위주의 세력의 위협도 문제지만, 이미 코로나 위기를 거치면서 드러난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이 산업안보라는 명목으로 주요 전략산업에 대한 각국의 산업정책을 부추기고 있다. 미·중 갈등은 물론 한층 복잡해진 대내외 경제 여건에 요동치고 있는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산업정책은 성공할 수 있을까? 역사적 경험에 따르면 산업정책은 다수의 성공 사례가 있다고 평가되곤 한다. 특히 선진국의 경우 과거 산업화 시기에 산업정책을 통해 경제적 도약에 성공했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당시 중상주의나 보호주의가 일시적으로 기승을 부리기도 했지만, 정작 지배적인 패러다임은 자유무역이었다. 또 19세기 미국의 부상에 대해서도 흔히 고관세 등 보호주의 조치에 주목하지만, 오히려 안정적인 자금지원을 위한 은행법이나 반독점법과 같은 제도 정비가 주효했다는 분석이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산업정책의 성공을 당연시할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중국의 성공 역시 산업정책보다는 개방과 민간 혁신에 의존하는 측면이 강하며, 그간 중국의 반도체는 물론 조선이나 항공업 육성 등 야심찬 목표들은 득보다 실이 큰 모습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지정학적 긴장으로 공급망의 안정성에 대한 의문이 커진 데다 기후변화 대응이나 대내 일자리 보호 등 현안들이 부각되는 상황에서 산업정책에 대한 관심은 얼마간 불가피할지도 모르겠다. 이와 관련해 국제통화기금(IMF)의 루치어 아가월이 제시한 ‘성장전략의 트릴레마’(Growth Strategy Trilemma)에 주목해보자.
그는 먼저 정책결정가들은 이른바 성장 강박증과 불안정 공포 탓에 당장의 가시적 성과를 목적으로 산업정책, 특히 ‘국가대표 선수’의 육성에 관심이 쏠린다고 진단한다. 이로 인해 성장전략에서 드러나는 성장 대 안정이라는 전통적 상충 관계는 새로운 트릴레마로 진화한다. 지속 성장과 금융·재정 안정, 국가대표 선수 육성이라는 성장전략의 세 가지 축 모두 동시 성립은 불가능하며, 두 가지만 선택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트릴레마 아래에서는 세 가지 성장전략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금융·재정 안정과 대표선수 육성의 조합인 ‘안전한 대표선수 육성’ 전략이다. 이는 공격적인 성장전략의 편익보다는 안보나 위기관리 그리고 경제의 복원력을 중시한다. 반면, 두 번째는 지속 성장과 대표선수 육성의 결합인 ‘과감한 대표선수 육성’ 전략이다. 안정보다는 위험 감수를 통해 높은 성장을 추진하는 전략이다. 마지막은 지속 성장과 금융·재정 안정을 조합한 ‘공정시장 자본주의’ 전략이다. 개방과 공정경쟁에 기반한 역동적인 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 다각화와 국제협력을 통해 공급망 붕괴 위험을 완화하고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전략이다. 바람직하기로는 세 번째 전략일 터이나 지금은 산업정책을 전제로 두 가지 선택밖에 남지 않은 모습이다. 게다가 산업정책 위주의 성장전략은 각국 간에 사실상 경제적 군비경쟁으로 귀착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최고의 장군은 전쟁을 가장 싫어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싸우려는 사람이다. 지금은 산업정책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산업정책 자체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
양강의 틈새에 끼인 채 글로벌 공급망 재편 압력에 시달리는 우리로서도 다양한 정책실험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손쉬운 단기 실적에 얽매이기보다는 국민경제 전반, 나아가 국제협력 관계까지 고려한 장기적인 포석과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중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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