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웃으며 안부를 물어요
서울에 와서 알았다.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릴 수도 있다는 걸.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오니 지층의 자취방은 이미 발목까지 침수가 되어 문을 여는 것도 힘들었다. 패닉 상태였는데 이상하게도 배가 고팠다.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사서 먹었다. 학교도 자퇴하고 집도 멋대로 나와 혼자 살아가던 열 일곱 살이었지만 그런 패기는 절박한 순간이 되자 위력을 잃었다. 나는 여전히 판단과 결정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10대였다. 창밖으로 그칠 기미 없는 비를 보면서 생각했다.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지?’ 생각은 깊어질 것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 ‘도움을 요청한다.’
지방에 있는 부모님이나 나와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에겐 전화를 하지 않았다. 원망이나 위로를 듣기보다는 당장의 해결책이 필요했다. 청소년 영상센터에서 촬영과 편집을 가르쳐주던 대학생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어볼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워크숍을 해산할 때 언니가 한 말에 눈을 질끈 감고 기대었다. 언니가 전화를 받자마자 눈물이 터져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간신히 상황을 설명한 끝에 언니는 대답했다. “노량진역 롯데리아에서 보자.” 어느덧 저녁 일곱 시였다.
오렌지주스 한 잔을 주문한 뒤 입구 의자에 앉아서 옷을 말리고 있는데 언니가 뛰어 들어왔다. “세상에! 비도 맞았어? 왜? 우산이 없었어?”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치킨버거 세트를 사겠다고 했는데, 언니는 지금 그럴 시간이 없다며 빨리 자기 집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언니의 집은 마천동에 있는 투룸이었다. 집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언니가 말했다. “모든 건 일단 밥을 먹은 뒤에 얘기하자.”
내가 의자에 앉아 초조함에 다리를 떨고 있을 동안, 언니는 요리를 시작했다. 흰 쌀을 밥솥에 안치고 애호박을 썰면서 물었다. “고추장찌개 괜찮아? 된장찌개 해주고 싶은데 마침 된장이 다 떨어졌어.” 다진 고기와 채소들이 가득 들어간 뚝배기엔 빨간 고추기름이 맛있게 떠 있었다. 냉장고에 있던 연근조림까지 꺼내니 순식간에 한 상이 차려졌다.
고추장찌개를 태어나 처음 먹어봤다고 하니 언니가 웃으면서 “너무 쉬운 요리니까 집에서 해보라”고 했다. 언니는 침수된 집이 언제 복구되는지 묻는 대신 마늘을 얼려서 보관하는 방법과 고추장찌개의 육수를 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으로 제작된 KBS의 <장바구니 집사들>은 아동복지시설과 위탁가정에서 성장한 청년들에게 매주 한 번 건강한 식재료가 담긴 장바구니를 배달하는 방송이다. 방송은 올 한 해 자립준비 청년들에게 2500개 장바구니를 후원하는 것이 목표다. 장바구니에는 규칙이 있다. ‘간편식 금지’ ‘제철 식재료 필수’ ‘3대 영양소를 고려’. 주로 컵라면이나 냉동음식을 먹는 자립준비 청년들의 올바른 식습관을 위한 구성이다.
골고루 담긴 장바구니를 받았지만 식사준비에 익숙하지 않은 청년들은 당황하며 가자미를 굽다 살을 전부 부수고, 해동하지 않은 고기를 볶다 태우기도 한다. 혼자 사는 작은 공간이다 보니 식사도 바닥이나 쌀통 위에서 한다. 집밥을 만들어 먹는 것이 여러모로 불리한 환경이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는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던 때, 또다시 꽉 채워진 장바구니가 그들의 집 앞에 도착한다.
좋은 식단을 만드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서 <장바구니 집사들>은 이들에게 한 상을 차려주는 대신 냉장고를 채워주며 스스로를 위한 식사의 중요성을 알리고, 삶의 경험을 나눈다.
편의점 음식으로 달래지지 않았던 마음의 허기가 어떻게 채워졌는지 알기에, 안부인사가 담긴 장바구니는 더없이 씩씩한 환대처럼 느껴진다. 사람은 누구나 잘 차려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부디 출연자 모두가 ‘집밥고수’가 되길 기도하며 어린 내게도 안부를 보낸다.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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