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사는 게 뭐길래] ‘먹고사니즘’에 바쁜 당신, 오늘 아침 안녕하십니까

장강명 소설가 2023. 6. 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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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코미디 ‘말이야 바른…’을 보며 무력한 한국 사회를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차별하면서 차별받는 사람들, ‘웃기는 공포영화’ 같아
10년 새 이런 구조 더 단단해져… 새로운 상상으로 빈틈 찾아내야
일러스트=이철원

옴니버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를 보았다. 서울독립영화제가 기획해서 제작하고 배급하는 작품인데, 감독 6명이 만든 단편영화 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상영 시간이 69분이라 단편영화 한 편당 길이는 10분을 조금 넘기는 정도다. 장르는 블랙 코미디 사회 풍자물.

윤성호 감독이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고 김소형, 박동훈, 최하나, 송현주, 한인미 감독이 참여했다. 순제작비가 6000만원도 안 된다니, 그냥 저예산 영화라고 부르면 안 될 거 같고 초저예산 영화, 혹은 초초저예산 영화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등장인물은 3명 이내로 하고, 한 장소에서 찍어서 6시간 안에 촬영을 마친다는 등의 가이드라인을 먼저 정했다고 한다.

액션도 추격전도 현란한 특수효과도 없는 이 영화를 나는 정말 재미있게 보았다. ‘이거 아트무비고 우리 예술 합니다’ 같은 분위기는 전혀 없으니 나처럼 편협하게 오락 영화만 찾는 관객이라도 안심하고 보셔도 된다. 영화 6편 모두 무척 속도감 있어서 한눈팔 새가 없다. 감독들이 진짜 대단하다 싶었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배우 두 사람이 앉아서 나누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연하게도 그들 사이에는 어떤 긴장이 있다. 인물들의 사연은 현실적이며, 그들이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황당한 논리를 동원하거나 자기 밑바닥을 드러내는 데서 웃음이 나온다. 거기에 착취, 차별, 혐오, 동물권, 환경 문제 같은 이슈가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영화의 묘미는 여기서부터다. 10여 분 분량의 영상에 과거가 복잡하고 인생관이 독특한 입체적인 캐릭터를 둘씩이나 만들어 넣을 수는 없을 터.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따로 설명도 필요 없는 평범한 인물들이 나온다. 그런데 그들은 영화에서 전형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악독한 가해자나 선량한 피해자 같은 전형적인 역할을 맡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캐릭터 대부분은 착취하는 사람-착취당하는 사람, 차별하는 사람-차별받는 사람, 혐오하는 사람-혐오당하는 사람이라는 구도 어느 한 편에 딱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착취, 차별, 혐오, 동물권, 환경문제에 있어서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착취를 하는 사람이면서 착취를 당하는 사람이고, 차별이나 혐오에 반대하면서 거기에 가담한다.

내가 이 영화의 인물들을 둘로 나눈다면 자신이 서 있는 맥락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하겠다. 맥락을 아는 사람이라고 더 괜찮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첫 작품 ‘프롤로그’에 나오는 대기업 과장과 외주업체 사장은 둘 다 자신이 속한 맥락을 알지만 경멸스럽다. 그들도 서로를, 또 스스로를 경멸한다. 반면 ‘손에 손잡고’에 나오는 청춘 남녀는 자신들이 속한 맥락을 끝까지 모르지만 귀엽다.

각 인물들의 맥락을 전부 아는 사람은 관객뿐이며, 영화를 보다 보면 한국 사회의 바로 그 맥락들에 대해 저절로 생각이 깊어진다. 여기서 ‘맥락’이라는 단어를 ‘구조’로 바꿔 써도 될 것 같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착취, 차별, 혐오, 종차별주의, 환경 파괴의 구조 속에 있다. 그런데 그 맥락을 알건 모르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맥락을 아는 인물들은 환멸과 자기혐오를 겪는다. 맥락을 모르는 인물들은 화면 밖에 있는 관객의 비웃음을 산다. 구조 자체가 착취, 차별, 혐오, 종차별주의, 환경 파괴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만 같다. 관객은 어느 순간 자신 역시 그런 구조 안에 있음을 아찔하게 깨닫고 얼굴을 붉히게 된다. 관객 감상평 중 ‘웃긴 공포영화’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바보가 되지 않으면 환멸과 자기혐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 그 구조는 정의롭지 않고, 가끔은 논리적이지조차 않다. 그러면 어쩌겠나, ‘진정성 실전편’의 마케팅부서 팀장처럼 그런 부조리한 상황에 내 생각을 맞춰야지. 그때의 괴로움, 무력감, 굴욕감을 일컬어 ‘먹고사니즘’이라는 말이 나왔더라.

그런 구조가 점점 더 단단해지는 듯하다는 느낌을 10년째 받고 있다. 옴짝달싹 못 하게 갇힌 기분, 일본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폐색감(閉塞感)’이 든다. 무엇을 해야 하나? 좋은 블랙 코미디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극장 밖에서 이제부터 고민해야 한다. 구조에 빈틈은 없을까. 더 나은 구조는 가능하지 않을까. 공부도 해야 하고 취재도 해야 하고 상상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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