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세 살 때 저도 응급실에서 뇌 CT를 찍었습니다”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2023. 6. 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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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서는 평소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다. 응급실에서 일하고 나서야 아이들이 머리를 부딪혀서 병원에 자주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응급실이 아니라면 배울 수도 없던 사실이었다.

아이들은 활동적이고 상대적으로 머리의 비율이 높다. 자연스럽게 넘어지거나 떨어지면 머리가 우선적으로 닿는다. 하지만 아이의 두개골은 성인에 비해 유연해서 외력을 흡수한다. 또 몸집이 작고 힘이 약하며 보호받는 환경에 있기에 일상생활에서 심각한 손상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두개골 골절이나 뇌출혈은 정상적 양육 환경의 아이에게는 대단히 드물다. 그중 응급 수술이 필요한 치명적 손상은 응급실에서 일 년에 한두 건 정도다. 대부분은 별다른 처치 없이 관찰만으로 회복된다. 어릴 때 머리를 다쳐도 후유증이 남아있는 성인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비슷한 이유다. 교통사고나 의도적인 학대 정도만 아니라면 아이들은 놀다가 다치기도 하면서 문제없이 성장한다.

그러나 의학적 소견과 양육자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아이가 머리를 부딪힌 것을 직접 목격하면 보호자는 불안하고 후유증이 남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환아는 별다른 증상이 없거나 약간의 증상만을 호소하지만 보호자는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응급실 의사에겐 많은 수가 찾아오면서 손이 많이 가는 경증의 환자군이다. 대부분은 경과 관찰만으로 충분하지만 CT를 촬영하지 않으면 뇌출혈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불안하면 CT를 찍어야 하고 촬영을 위해 진정제를 사용해야 한다. 이상이 없으면 이번에는 진정제와 CT의 방사선이 문제가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아이에게 처치할 것은 거의 없으나 보호자를 설득하는 것이 주요 업무인 환자군이다.

중증 환자와 더불어 유독 머리를 부딪힌 아이와 보호자에게 시달린 응급실 근무였다. 너무 지친 새벽에는 보호자에게 왜 오셨냐고 물을 뻔한 위기도 있었다. 아침에 퇴근하면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했다. 아이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 부모님이 예민하다고, 응급실까지 이렇게 쉽게 와도 되는 것이냐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너 어렸을 때, 세 살인가 네 살쯤이었던가, 그때 너도 한 번 머리를 부딪혀서 병원 데리고 간 적이 있단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생각해 보니 지금 너희 병원인 것 같구나.”

다음 날 그 말이 기억이 나서 한번 찾아보았다. 병원 전산에 내 이름을 넣어보니 정말 오래전에 병원을 방문한 기록이 있었다. 1980년대의 기록이라 확인하려면 문서 보관실에 찾아가야 했다. 힘들게 발견한 차트에는 세 살밖에 되지 않은 내가 보호자와 함께 와서 CT를 찍고 이상이 없어 귀가했다고 쓰여 있었다. 당연히 전혀 기억에 없었다. 차트는 내가 하루에 몇 번씩 쓰는 것처럼 건조했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보호자가 어머니였으니 옛날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당시 우리는 수도권의 중소도시에 살았다. 어머니는 운전면허도 없었고 동생은 아직 젖먹이였다. 내가 머리를 부딪히는 것을 본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칭얼대는 동생을 이웃에게 부탁하고는, 세 살밖에 안 된 나를 데리고 전철과 버스를 갈아 타면서 서울의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CT를 찍고서야 안심해 돌아왔던 것이다. 나도 한때 아이였고 똑같이 보호받으며 성장했음을 잊고 있었다.

그때부터 예민한 보호자가 밉지 않아졌다. 지금은 CT를 찍고 후유증이 남을까 걱정된다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저도 이만할 때 바로 여기서 CT를 찍었습니다. 보시다시피 멀쩡하게 잘 자라서 지금 똑같이 여기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아이는 건강하게 성장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삶은 자꾸 자신의 과거를 잊고 남의 처지도 잊는다. 상대방이 나의 어떤 기억이라고 생각한 순간 모든 것이 밉지 않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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