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정의 음악 정류장] [83] ‘노오란 샤쓰’의 추억

장유정 단국대 정책경영대학원 원장·대중음악사학자 2023. 6. 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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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순회공연을 막 마치고 돌아온’이라는 유행어를 사용하여 유명 가수를 소개하던 때가 있었다. 세상이 달라져서 지금은 ‘세계 순회공연’ 정도는 운운해야 제격이지만 한때 이 유행어는 인기와 명성을 뜻하는 최고 찬사였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단정할 수 없지만 1960년대 초반 인기 절정 가수 한명숙에게는 실제 상황이었다. 그가 1961년에 발표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베트남, 태국, 대만 등에도 크게 알려졌다. 동남아 순회공연을 막 마치고 귀국한 그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쉴 틈도 없이 곧바로 국내 공연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새로운 경향의 음악이 대중적으로 성공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도전하지 않으면 창조의 기쁨도 없다. 손석우가 작사하고 작곡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여러 면에서 파격적이었다.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KBS교향악단에서 활동하던 김형진에게 반주를 부탁하는 등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미국 컨트리 음악 맛을 내고자 온 힘을 다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대중성이 없다며 극구 만류했는데, 맑고 청아한 음색에 젖어 있던 대중이 탁성에 가까운 한명숙의 음색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 그이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이 쏠려”라며 남성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여성의 적극적 태도가 시대 분위기와도 사뭇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손석우는 음악적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한동안 반응이 없다가 몇 달이 지난 1961년 여름 무렵 흥행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1962년 8월에는 음반이 20만장 팔려나갈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프랑스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가 한국어로 녹음하기도 했다. 노래의 인기에 힘입어 한명숙은 1963년에 영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엄심호 감독)에 엄앵란, 신영균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손석우의 음악적 열정은 노래 제목에도 스며들어 있다. 선율에 맞추고 강한 인상을 주려고 일부러 ‘노오란’이라 하고 ‘셔츠’라는 말이 억지스럽게 느껴져 ‘샤쓰’라 했다고 한다. ‘노란’ 또는 ‘셔츠’ 등으로 제목이 변형되어 사용되는 상황을 지목하여 손석우는 생전에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지켜달라는 간절한 심정을 필자에게 전하기도 했다.

당시 노래가 유행하면서 온 세상은 노랗게 물들었다. 그때처럼 ‘노오란 샤쓰’의 여름이 돌아왔다. 마침 서울의 용산 어린이정원에서 K팝 한류의 원류를 찾는 ‘미8군 쇼 70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에서 한명숙을 포함한 한류 초기 가수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아울러 병중인 한명숙 선생이 쾌차해 다시 환담을 즐길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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