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테크] 양자컴퓨팅 시대의 ‘CD롬’ 한국 과학자가 만든다… 광자 이용한 데이터 저장 기술 등장

이종현 기자 입력 2023. 6. 1. 00:01 수정 2023. 9. 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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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덕 UNIST 화학과 교수 연구팀 연구 성과
2021년 ‘광사태’ 논문에 이어 이번에도 네이처에 논문 게재
UNIST 서영덕 교수 연구팀이 양자컴퓨팅 시대에 활용할 수 있는 광스위치 양자 메모리 원천기술을 개발했다. /UNIST

컴퓨터 보조 기억장치인 플로피 디스크가 처음 등장한 건 1971년이다. IBM이 처음 플로피 디스크를 내놨고, 우리가 익숙한 1.44메가바이트(MB, 100만바이트)의 플로피 디스크가 나온 건 1987년의 일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플로피 디스크는 웬만한 사람의 손바닥보다 컸다.

하지만 컴퓨터 보조 기억장치의 크기가 줄어들고 저장 용량이 늘어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손가락 크기보다 작은 USB 하나가 몇 기가바이트(GB, 10억바이트)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게 됐고, 손톱 크기만한 마이크로SD 카드 하나에 테라바이트(TB, 1조바이트)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 컴퓨터 공학자들이 지금을 TB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다.

엔지니어들보다 한 발 먼저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는 과학자들은 TB를 넘어서 페타바이트(PB, 1000조바이트)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10의 15승을 의미하는 페타에 컴퓨터 데이터 표시 단위인 바이트를 합친 디지털 정보 용량 단위를 PB라고 한다. 1페타는 1000조를 의미한다. 아직까지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단위는 아니다. 컴퓨터 분야에서도 대용량 서버 등에서 쓰이는 단위다.

페타라는 단위를 쉽게 볼 수 없는 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인프라나 기술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국내 연구진이 바로 이 ‘PB’를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 저장 기술의 실마리를 찾았다. 양자컴퓨터 시대에 저장 장치를 쓸 수 있는 기술이다. 향후 상용화로 이어지면 양자컴퓨터 시대의 IBM이 한국 과학자의 손에서 탄생할 수도 있는 셈이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은 서영덕 화학과 교수가 이끄는 국제공동연구팀이 지속가능한 나노결정 양방향 광스위치 현상과 원리를 찾아냈다고 1일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5월 31일(현지시각) 온라인 게재됐다.

지속가능한 나노결정 양방향 광스위치 현상이라는 복잡한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선 서 교수가 한국화학연구원에 재직하던 2021년 네이처 표지에 게재된 ‘광사태(Photon Avalanche)’ 관련 논문을 먼저 살펴야 한다.

광사태는 서 교수가 세계 최초로 찾아낸 현상이다. 작은 에너지의 빛을 나노입자에 쏘이면 빛이 증폭돼 더 큰 에너지를 가진 빛을 방출하는 현상을 발견해 ‘광사태’라는 표현을 붙였다. 작은 눈덩이가 언덕을 굴러내려오면서 점점 커지는 눈사태가 일어나듯 작은 빛 에너지가 더 큰 빛 에너지로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광사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걸 조금 더 과학적으로 표현하면 상향변환(upconversion)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인 물질은 빛 에너지를 흡수하면 열 등으로 소모한 뒤에 처음 흡수한 것보다 적은 에너지를 방출한다. 그런데 서 교수는 일부 나노입자는 작은 빛 에너지를 받더라도 내부에서 서로 결합하면서 더 큰 빛 에너지를 방출하는 현상을 찾아낸 것이다.

모든 나노입자가 상향변환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서 교수는 2021년 네이처 논문에서 툴륨(Tm)이라는 원소를 나노입자로 합성했을 때 상향변환이 일어난다고 밝혔다. 툴륨은 원자번호 57번부터 71번까지 15개의 원소를 총칭하는 란탄족 금속의 하나다.

서 교수 연구팀은 2021년 네이처 논문에서 광사태라는 개념을 제시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나서 다시 한 번 네이처에 논문을 게재하며 광사태와 상향변환의 구체적인 응용처를 제시했다.

2021년 네이처 표지에 게재된 '광사태' 논문을 함께 쓴 서영덕(오른쪽) UNIST 교수와 P. James Schuck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서영덕 교수

연구팀은 란탄족 금속을 도핑한 나노입자는 일반적인 형광분자에 비해 광안정성을 보인다는 걸 밝혀냈다. 일반적인 형광분자는 빛을 받으면 무작위로 깜빡이고, 결국에는 완전히 탈색돼 사라져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형광분자는 수명이 짧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이런 과정을 ‘광탈색’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란탄족 금속이 도핑된 나노입자는 광탈색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연구팀은 다양한 주변 환경에서 나노결정의 점등과 소등을 수천 번 이상 반복하면 안정성을 확인했다.

안정적으로 상향변환을 일으키는 나노입자를 발견한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이길래 세계 최고의 학술지인 네이처에 두 차례나 실린 걸까. 서 교수는 이 기술이 양자컴퓨팅 시대의 새로운 기억장치를 만드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서 교수는 “과거 많이 사용됐던 CD-ROM이나 CD-RW의 원리처럼, 향후 초고성능 양자 컴퓨터에서 생성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한 광양자 메모리 장치로 발전될 것”이라며 “거대한 데이터 저장 용량을 가지면서도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고, 정밀하게 작동될 수 있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나노결정이 점등과 소등을 반복한다는 건 쉽게 말해서 기억 장치에 데이터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USB나 마이크로SD 카드에 새로운 데이터를 저장했다 지웠다 하듯이 나노입자를 활용한 컴퓨터 저장장치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USB와 나노입자를 활용한 방식의 차이는 속도다. 지금의 컴퓨터 보조 기억장치는 전자에 기반을 두지만 서 교수가 찾아낸 방식은 광자를 활용한다. 서 교수는 “양자컴퓨터가 개발되면 CPU부터 전자 방식에서 광자 방식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며 “올 옵티컬 컴퓨팅(All-Optical Computing) 시대가 열리면 데이터 처리 용량도 테라 단위에서 페타 단위가 기본으로 바뀌게 된다”고 말했다.

서 교수가 이번에 입증한 ‘지속가능한 나노결정 양방향 광스위치 현상’은 이런 올 옵티컬 컴퓨팅으로 가는 분기점인 셈이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에 대해 “정보의 저장 밀도가 지금의 1000배에서 많게는 100만배까지도 늘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차세대 반도체 분야의 전문가인 권 교수는 서 교수의 연구 성과가 반도체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될 여지가 많다고 설명했다. 권 교수는 “많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전자를 대신해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입자를 찾고 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광자”라며 “이번 연구는 전자에서 광자로 넘어가는 하나의 마일스톤을 쌓은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연구의 방향을 광양자 메모리, 초해상도 나노경 등으로 확장하고 있다. 버클리연구소의 ‘나노입자 합성로봇’을 사용해 이런 결정의 특성들을 더욱 향상시키는 방법도 연구하고 있다. 비슷한 광전환 특성을 보이는 다른 나노입자를 만드는 것도 후속 연구의 목표 중 하나다.

서 교수와 공동 연구를 진행한 버클리연구소의 코헨 박사는 “2009년에 란탄족 금속 산화물 나노입자로부터 나오는 발광 빛은 점멸하지도, 탈색되지도 않고 늘 켜져 있다고 주장해 왔던 연구 방향이 이번 발견으로 인해 뒤바뀌었다”며 “인위적으로 무한 점멸이 가능한 양방향 광스위치 현상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루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Nature(2023),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6076-7

Nature(2021), DOI : https://doi.org/10.1038/s41586-020-0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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