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그놈 목소리
영화 <그놈 목소리>는 1991년 이형호군 유괴살인 사건을 다룬다. 당시 유괴범은 이군 집으로 60여차례나 협박전화를 걸어 몸값을 요구했다.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했고, 2006년 공소시효가 만료돼 지금까지 미제로 남았다. 영화는 ‘그놈’의 실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잡히지 않은 범인의 육성만 이 사건을 풀 단서로 남았다.
모든 사람의 목소리에는 고유한 파장이 있다고 한다. 혹여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가성을 내거나 남의 목소리를 흉내내더라도 특징은 감출 수 없다는 얘기다. 목소리를 시각화하면, 사람마다 고유한 띠 모양의 패턴이 나타나고 이를 ‘성문’이라고 한다.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목소리 지문’인 셈이다.
지문에 비해 음성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됐다. 1962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벨연구소에 화자 식별에 관한 연구를 처음 의뢰했다. 그 연구에서 사람 목소리는 지문처럼 각자의 특징이 있고, 식별 정확도가 99% 이상으로 밝혀졌다. 이때부터 범인 목소리를 필름으로 보관해 수사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1981년 대학생 사유리 유괴 사건 때 범인 전화 목소리로 나이·키·출신지역 등을 파악한 후 공개수사를 폈고, 시민제보로 범인을 잡은 적 있다.
국내에서도 성문을 다양한 수사에 활용하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지난 8년간 발생한 보이스피싱 범죄 음성 파일 1만2000여개를 인공지능(AI)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그 결과 보이스피싱 조직은 총 235개가 있고, 총 5500여명이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음성을 비교하면 연루자 파악에 도움이 될 것으로 행안부는 기대한다.
근래 보이스피싱 수법은 17년 전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어설프지 않다. 단일 사건 기준 최대 피해액은 41억원에 달한다. 서울중앙지검 검사라고 밝힌 ‘그놈’ 목소리에 한 의사가 대출까지 받아 돈을 송금했다. “보이스피싱은 공감이란 말이야. 보이스피싱은 무식과 무지를 파고드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희망과 공포를 파고드는 거지.” 영화 <보이스>에 나오는 범죄자 곽프로의 대사다. AI가 채록한 ‘그놈’ 목소리들로 보이스피싱을 예방·추적하는 날이 눈앞에 왔다.
이명희 논설위원 min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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