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은이 그림 1만장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한겨레 입력 2023. 5. 3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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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작업에 몰입 중인 예은이. 이병곤 제공

[세상읽기]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

‘나를 한번만 더 달에 데려다줘~.’

가수 정우씨의 ‘나에게서 당신에게’가 배경음으로 흐르면서 <학교의 일상을 담은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 첫 장면이 시작됐다. 아이들은 일제히 “와~” 탄성을 내질렀다. 몰입하느라 유지됐던 침묵과 잠깐의 환호성이 4분30초 동안 여러차례 오갔다.

강당 문을 나섰다. 운동장 가장자리를 배회한다. 뭉클한 감동의 여진이 가시지 않는다. 1만장. 방금 본 영상을 만드느라 이예은이 1년 새 그린 그림 총량이다. 아이는 귀농한 부모 따라 우리 학교 근처로 이사왔다. 초등 1학년 때라 했다. 마을 친구들에게 돋보이고 싶어 만화책 그림을 따라 그렸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즐겨 봤다.

제천간디학교 중3. 이들에겐 넘어야 할 문턱이 있다. 논문 제출. 입학 뒤 2년간 신나게 놀다가 부딪히는 첫 난관이다. 10월 말까지 200자 원고지 300매 가까이(5만5천자 안팎) 글을 써내야 한다. 논문 총괄 담당교사는 1학기 동안 논문 작성법 강의를 진행하며, 온라인 카페를 열어 학생들의 진행 상황을 점검한다.

“이거 만드느라 4년 모은 용돈 다 썼어요. 우선 맥북을 샀어요. 그림 입력에 필요한 액정 태블릿, 편집용 소프트웨어인 ‘클립 스튜디오 이엑스(ex)’도 필요했죠.” 자신은 화장품이나 옷에 관심 없으니 괜찮았다고 배시시 웃었지만, 이쯤 되면 아이는 논문 쓰기에 모든 걸 다 건 거다.

교사회는 논문 작성 방식을 연구·작품·프로젝트, 이렇게 세갈래로 나눴다. 어떤 것을 정하든 자신의 탐구 활동을 논문 형식에 담아 제출해야 한다. ‘교내 전기사용 줄이기 운동과 그 결과에 대한 보고’를 주제로 잡았다고 가정하자. 아이는 교내 캠페인 펼치기, 현황 조사 등 여러 데이터를 모아 정리하고, 그것을 논문으로 작성해야 한다. 전문가 평가와 참여자 반응까지 본문에 포함하는 것은 필수이다.

10월 말, 이틀에 걸쳐 온종일 최종 발표회를 연다. 구성원 전체가 강당에 모이는데 이날은 학부모들까지 참관하기에 규모가 제법 크다. 발표와 질문에 배정한 시간은 30분. ‘중3 연구자’에겐 가슴 콩닥거리는 날일 수밖에 없다.

“그냥 하다 보니까 되더라고요. 유튜브 검색하면 애니메이션 제작 방법은 많아요. 여름방학 때 미술대학 교수님이 진행하는 ‘키즈툰애니틴스쿨’ 강좌를 신청해서 들었죠. 실무를 익힌 건 아니지만 ‘그림이라는 물체’를 움직이게 하는 원리를 배우긴 했어요.”

미술학원 하나 없는 덕산면. 여기 살면 모든 게 독학이다. 그게 되레 장점으로 작용한다. 배움 의지가 솟는 것이다. 대개 논문을 다 마친 사람은 자기 글뿐만 아니라 전공했던 주제조차 한동안 다시 쳐다보기 싫어한다. 자신을 ‘허술한 완벽주의자’라 자처하는 예은이는 그렇지 않았다.

“광주광역시가 주관하는 공모전에 새 작품을 내려 해요. 더 나은 애니메이션 제작 방법을 유튜브에서 찾아봤죠. 딱 봐도 영어로 된 자료가 더 낫다는 건 짐작하겠어요. 근데 자세히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어요. 휴대전화 어플(앱) ‘말해보카’를 내려받아서 혼자 영어 공부를 하고 있어요. 연 회비가 9만원이나 하지만 그래도 제가 원하는 걸 배우니까 재미있어요.” 동급생 가운데 ‘수줍음 지수’ 최고인 예은이. 하지만 이 말을 내게 전할 때 반짝이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창의력과 끈기, 집중력을 발휘해 우리 학교 논문 과정을 마친 아이들 사례는 너무 많다. 시간, 관심, 조언, 정보 제공만 이뤄지면 누구나 이 교육과정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요즘 미래사회와 미래교육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게 별건가. 학교는 아이들에게 관심거리와 의미 있는 활동을 제공하는 ‘역사’(驛舍)가 되어주고, 아이들은 각자의 ‘플랫폼’에서 교사의 조력을 받아 집중하고 싶은 것에 깊이 빠져들면 된다.

<몰입의 즐거움>을 쓴 저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말한다. “관심을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은 경험을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삶의 질로 직결된다.” 관심을 다스리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 활동 그 자체를 즐기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이 뜻한 곳으로 마음 기울이는 기술을 터득한다. 경험이 만족스러운 성과로 쌓일 때 우리는 비로소 배움을 즐긴다. 예은이가 걸어가며 보여줬던 길이다. 아이의 집중력과 끈기에서 나도 한수 배웠다.

예은이의 작품 가운데서. 이병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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