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분노가 힘이 될 때

한겨레 2023. 5. 31. 19:4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숨&결]

게티이미지뱅크

[숨&결] 유지민 | 서울 문정고 1학년

쉬는 날 서울 근교로 나들이를 가는 것을 좋아한다. 다양한 지역 중에서 가장 자주 가는 곳은 경기도 수원이다. 지난 4월 어느 주말에도 훌쩍 수원으로 떠났다. 내가 온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와준 친한 언니와 함께 반나절을 보낸 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기로 했다.

화성행궁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정류장이 원형 모양이어서 혼자 버스를 타기 어려웠다. 저상버스의 경사로를 펴기 위한 공간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함께 있던 언니가 대신 기사에게 내가 타야 하니 경사로를 펼쳐달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버스에 타려는 순간, 기사가 밖을 흘끗 쳐다보더니 다음 차를 타라는 말과 함께 나를 태우지 않은 채 그냥 차를 출발시켰다. 승차거부를 당한 것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황당했다. 버스기사가 나를 보지 못하고 차를 출발시킨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명확하게 승차 의사를 밝혔음에도 무시당한 건 처음이었다. 오죽하면 ‘저상버스가 아닌데 착각하고 잘못 말했나?’라는 생각이 들어 전광판을 다시 확인했을 정도다. 그런데 그 순간, 주변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나 대신 화를 내기 시작했다. 버스기사에게 욕을 퍼붓는 할머니, 승차거부로 신고하라며 차량번호를 알려준 아주머니까지. 최악의 상황 속에서 따뜻한 인류애를 느꼈다.

전혀 관계없는 타인일지라도 누군가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분노한다. 하지만 그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거나 직접 문제제기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장애인 차별 철폐를 외치는 나도 옳지 못한 상황을 눈앞에 두고 항의하지 못한 적이 수두룩하다. 시간이 지난 뒤엔 ‘그 상황에서 나섰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하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내가 겪은 일에 함께 화낼 수 있었을까?

버스가 나를 지나쳐 가자 한 할아버지께서 큰 소리로 기사를 향해 화를 내셨다. 그러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만 보던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배려와 마찬가지로 분노 또한 전염된다. 한명이 공개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면 망설이던 사람들도 그제야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이런 현상은 상황에 따라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지만, 이번 같은 경우에서는 개인 간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매개체로서 작용했다.

내 옆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어르신들이었다는 사실도 한몫했던 것 같다. 노약자로서 당신들도 내가 겪은 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크게 화를 내셨을 거라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적 약자 간의 교차적인 연대는 역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77년, 미국에서 재활법 집행을 요구하며 농성한 장애인들이 샌프란시스코 보건교육복지부 사무실에 고립당했다. 그러자 노동조합, 멕시코계 운동가 등 다양한 소수자 단체들이 연대했다. 특히 급진주의 흑인인권운동단체 ‘블랙팬서당’(흑표범당)은 농성단에게 매일 따뜻한 한끼를 제공했다. 이 사건을 다룬 킴 닐슨의 <장애의 역사>에서는 “대부분 백인이었던 장애인권 운동 집단에 블랙팬서가 연대한 것은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집으로 돌아와 이번 일을 곱씹어봤다. 나의 편을 들어준 생면부지의 모든 사람에게 고마웠고, 옳지 않은 일을 보고도 여러 이유를 들며 합리화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또한, 승차거부를 당했을 때 제대로 항의하지 못했고 차량번호도 적어두지 않아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신 버스기사에게 항의해준 사람들 덕분에 ‘그때 제대로 화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내가 받은 용기를 세상에 다시 돌려주고 싶다. 앞으로는 타인이 부당한 일을 당하는 상황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즉시 그 자리에서 함께 항의하고 화도 낼 거라고 다짐했다.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올 수 있게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주위를 더 꼼꼼하게 살필 것이다.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