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남용죄’ 남용 유감

한겨레 2023. 5. 3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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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검. 연합뉴스

[왜냐면] 이정환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

문재인 정부 시절, 이른바 ‘적폐청산’ 과정에서 형법 제123조 직권남용죄가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검찰이 국정농단 사건에서 박근혜·이명박 정부의 불법과 비리를 청산하는 수단으로 직권남용죄를 활용한 것이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자신의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을 불법하게 행사한 것을 처벌하는 것이다. 단순히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는 행위를 했다고 곧바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직권을 남용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거나 다른 사람의 구체적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결과가 발생해야 성립한다.

대법원은 2020년 1월30일 박근혜 정부가 특정 문화·예술계 인사에 대해 지원을 배제했던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전원합의체 판결로 ‘의무 없는 일’의 요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당시 청와대의 김기춘 비서실장과 조윤선 정무수석 등이 정부 견해에 비판적인 문화계 인사들에 대해 지원 배제를 지시한 직권남용 행위는 인정했지만, 지시를 받은 직원들이 한 행위를 세분화해 이들이 각종 명단을 송부하거나, 공모사업을 진행하며 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한 부분은 이들의 통상적 업무 행위라 봐, 직권남용이라고 판단한 원심을 파기했다. 즉 직권남용이 있더라도 그 상대방인 공무원 등의 행위가 법령에 따라 통상적인 업무 진행의 일환이고, 직무수행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이나 기준, 절차 등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면 ‘의무 없는 일’을 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의무 없는 일’에 대한 판단을 엄격하게 하라는 의미다.

그러나 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의 검찰은 직권남용죄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은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및 북한 어민 북송 사건과 관련해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 서훈·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서욱 전 국방부 장관 등을 직권남용 혐의로 수사해 기소했고, 공공기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조국 전 민정수석을 같은 혐의로 수사 중이다.

그리고 공수처 1호로 기소된 조희연 서울교육감의 교사특별채용사건에서 1심 법원은 직권남용죄를 인정해 유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이 사건 특별채용은 조 교육감이 전교조가 요구한 해직교사 등 5명을 내정했고, 장학사와 장학관들로 하여금 심사위원들을 선정하게 하고 또 이들이 일부 심사위원들에게 개별적으로 연락했다”며 이를 직권남용의 유죄로 인정했다. 법원은 이 사건에서 직권남용죄의 상대방이 된 공무원을 특별채용 절차와 심사위원 선정에 관여한 장학사와 장학관으로 봤다. 조 교육감이 장학사와 장학관들에게 지시한 것 자체가 특별채용 절차 전반의 불공정을 초래하는 것으로 조 교육감이 직권을 남용해 이들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직권남용 대상자(장학사와 장학관들)에게 그 일을 할 법령상 의무가 있는지를 살펴 개별적으로 ‘의무 없는 일’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1심 법원은 특별채용의 심사 자체에는 관여하지 않은 장학사, 장학관 등 하급 공무원들이 그들의 법령상 업무라 할 수 있는 교사채용 절차를 진행한 것을 법령상 ‘의무 없는 일’로 판단했다. 게다가 특별채용을 결정한 심사위원들에 대한 직권남용죄는 기소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이 판결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의무 없는 일’을 엄격하게 판단한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반면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관련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이광철 전 청와대 비서관과 차규근 전 법무연수원 연구위원, 이규원 전 검사에게 1심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법률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긴급 출국금지를 실행했다고 해서 이를 곧바로 ‘직권의 남용’ 또는 ‘직권남용의 고의’를 추단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고 했다.

직권남용죄는 권한이 집중한 고위 공직자들에 의한 국가권력 오남용을 처벌해 위법한 정책 결정 과정을 시정하는 순기능이 있지만, 남용할 경우 정책적 판단을 사법으로 단죄해 공무원의 적극 행정을 봉쇄할 우려가 있다. 또 정권 교체에 맞춰 정치보복에 쓰인다는 우려도 크다. 그러하기에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로 직권남용죄의 요건을 엄격하게 판단해 성립을 제한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대법원의 태도는 ‘직권’의 남용만큼이나 ‘직권남용죄’의 남용을 우려한 것이라 할 것이다. 앞으로는 대법원 판결의 취지대로 ‘의무 없는 일’에 대해 엄격한 법적 판단들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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