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불이 만났다, 새로운 ‘케미’가 시작된다···영화 ‘엘리멘탈’

오경민 기자 2023. 5. 3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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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민 ‘물’들이 주도하는 세계
‘엘리멘탈 시티’에 정착한 ‘불’
집단 거주지·차별·빈부 격차 등
애니로 담아낸 ‘이민자 이야기’
피터 손 감독 등 한국계 제작진
한인들 식습관 등 극중 반영도
영화 <엘리멘탈>의 주인공 앰버 루멘(레아 루이스)은 아버지의 잡화점을 함께 운영한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분투하던 그가 물인 웨이드(마무두 아티)를 만나며 인생의 방향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불들이 모여 사는 ‘파이어 타운’에서 태어난 앰버(레아 루이스)는 아버지와 함께 잡화점을 운영한다. 아버지는 앰버가 준비되는 날 가게를 물려주겠다고 말한다. 오래전 앰버의 부모는 고향을 떠나 망망대해를 건너 ‘엘리멘탈 시티’에 도착했다. 엘리멘탈 시티에는 물, 공기, 흙 등 여러 원소가 함께 살지만 불은 드물었다. 불을 상극처럼 여기던 물들이 이미 도시를 주름잡고 있었고 부모는 발 붙일 곳이 없었다. 쓰러져가는 폐가에 내몰린 이들은 그곳에서 앰버를 낳고 터전을 꾸렸다. 불들이 하나둘 모여 살기 시작해 ‘파이어 타운’이 만들어졌다. 앰버는 맨손으로 마을을 일군 부모의 희생을 알고 있다. 그는 하루빨리 아버지에게 은퇴를 선물하고 싶다.

디즈니·픽사의 새 애니메이션 영화 <엘리멘탈>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원소들이 어울려 사는 세계를 흥미롭게 그려냈다. 빨갛고 파란 원색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큼 <인사이드 아웃>을 연상케 하기도 하지만 주제는 전혀 다르다. 영화는 초반부터 이민자 가족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엘리멘탈 시티의 주류는 물이다. 곳곳에서 폭포수가 쏟아지고 대중교통인 운하는 물로 움직인다. 비교적 잘 어울리는 물, 흙, 공기와 다르게 불은 어딜 가나 차별을 당한다. 다른 원소들은 불을 보면 표정이 일그러진다. 불들도 자신들을 위협하는 물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가게 수도관에서 물이 새기 시작한다. 이때 앰버는 시청조사관인 물 웨이드(마무두 아티)를 만난다. 시내 곳곳의 누수를 조사하던 그는 앰버네 가게 수도관 등에서도 문제점을 발견한다. 앰버와 웨이드는 누수를 해결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물은 물끼리, 불은 불끼리만 어울리는 세계에서 특별한 우정을 만들어나간다.

<굿 다이노>를 연출한 한국계 피터 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지난 30일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손 감독은 “파이어 타운은 이민자 구역이다. 제가 어릴 때 뉴욕에서 자라며 느낀 것을 반영했다”면서 “여러 민족 공동체가 섞이며 사는 모습, 섞이지 못할 때 서로 이해하고 차이점을 극복하는 모습 등을 영화에 담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의 시작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굿 다이노>를 개봉하고 뉴욕에 부모님을 초청해 무대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당시 ‘희생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하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보였습니다. 픽사로 돌아와 이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말했더니 그들이 ‘바로 거기에 네 영화가 있다.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제 부모님은 1960~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와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제노포비아(이방인 혐오)와 차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다양한 손님들과 어울리는 아버지를 보며 이해와 공감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그것을 영화로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불 앰버(레아 루이스)는 불들이 모여사는 ‘파이어 타운’ 밖으로 나가지 않다가 아버지의 가게를 지키기 위해 물 웨이드(마무두 아티)와 함께 시내로 나온다. 다른 원소와 닿지 않기 위해 옷을 붙들어 맨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불에는 한국인 이민자들의 성격과 모습이 반영됐다. 극중 불들은 뜨거운 음식을 즐기는데, 한국인이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데서 착안했다. 이방인과 어울릴 때, 시험하듯 뜨거운(매운) 음식을 권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앰버의 할머니는 죽기 전 마지막 유언으로 앰버에게 “불과 결혼하라”고 말한다. 불들은 속도를 즐기고, 열정적이고, ‘불 같다’. 자전적인 경험에서 시작했지만 불 민족의 언어, 인사 등의 문화는 고유하게 만들고자 했다. 손 감독은 “불의 문화를 구상할 때 특정한 문화를 참고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는 낯설게 느낄 수 있는 다양한 문화권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었다”며 “모든 이민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이민자 2세인 앰버의 자아 찾기와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겪는 갈등은 또 다른 주제다. 완벽한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던 앰버는 자꾸 한계에 부딪힌다. 그는 웨이드를 만나면서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것은 파이어타운의 작은 가게가 아닌, 더 넓은 곳에 있을 수도 있다고 성찰한다. 앰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투명한 물 웨이드와의 만남은 앰버의 내면과 이들이 사는 세상에 예상치 못한 화학작용(케미스트리·chemistry)을 일으킨다.

한국계 감독인 피터 손은 자전적인 경험을 토대로 영화 <엘리멘탈>을 만들었다. 그는 지난 30일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민자 1세인 부모님이 보여준 헌신에 대한 감사를 담아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영화를 제작하는 중 돌아가셨다고 한다. 사진은 같은 날 오후 스페셜 GV에서의 모습.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이채연 애니메이터는 3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페어몬트 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제작 뒷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언젠가는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물, 불, 흙, 공기 등 원소들의 특성이 다채롭고 신비하게 표현됐다. 원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엘리멘탈 시티는 분주하고 웅장하다. 공기 선수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대결하는 ‘에어볼’과 바이크를 타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앰버의 질주는 시청각적 재미를 더한다.

이민자들을 향한 미묘한 차별(마이크로어그레션)이나 선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권력 차이도 영화 곳곳에 녹아있다. 엘리멘탈 시티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앰버는 웨이드의 가족에게 “우리 말을 잘한다”는 칭찬을 듣는다. 웨이드는 높은 빌딩의 고급스러운 집에 사는데, 엄마로부터 받았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데서 앰버네와의 격차가 느껴진다. 웨이드네 가족은 예술을 즐기고, 성격도 앰버네 가족보다 한껏 여유로워 보인다.

영화에는 손 감독 외에도 이채연 3D 애니메이터, 전성욱 레이아웃 아티스트, 김혜숙 애니메이터, 아널드 문 크라우드 테크 리드 등 한국계 인재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채연 애니메이터는 캐릭터들을 움직이는 작업을 맡았다. 원소들이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때도 불꽃이나 물방울 등 캐릭터의 형체가 계속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더 도전적인 작업이었다. 31일 그는 기자들과 만나 “알록달록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사랑 이야기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손 감독님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가 한국계라는 데에도 끌렸다”고 프로젝트에 합류한 계기를 말했다.

이 애니메이터는 한국에서 게임 애니메이터로 일하다 “캐릭터로 이야기와 감동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23세 때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소니 픽처스 등을 거쳐 ‘꿈의 직장’이었던 픽사에 입사했다. <엘리멘탈>은 <버즈 라이트 이어>에 이어 그가 픽사에서 작업한 두 번째 작품이다. 그는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 앰버가 기쁜 소식을 전해듣고 팔짝팔짝 뛰는 모습을 꼽았다. “제가 픽사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방방 뛰어다녔거든요. 그 생각을 하면서 작업을 해서 가장 애착이 갑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볼만한 영화다. 희망적인 메시지는 공감할 만하다. 다만 차별을 반복하는 세계는 공고한데 그 극복은 개인에게 달려있게 묘사된다는 점은 아쉽다. 앰버는 홀로 난관을 이겨야 한다. 웨이드가 여유롭게 ‘물 흐르듯’ 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물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엘리멘탈 시티에 먼저 자리 잡은 기득권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업>의 단편 스핀오프인 <칼의 데이트>가 상영된다. 14일 개봉. 상영시간은 109분.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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