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그리고 디자이너…라울 뒤피의 두 얼굴 [전시 리뷰]

이선아 2023. 5. 31.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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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뒤피
알트원 vs 한가람미술관
두 곳서 동시에 열리는 뒤피 전시
순수 회화 애호가라면 알트원
패션·디자인 보려면 한가람으로
더현대 알트원에 전시된 라울 뒤피의 ‘전기 요정’ 석판화. 가로 6m짜리 대작으로 뒤피가 나중에 덧칠했다. /지엔씨미디어 제공


“올해 프랑스에서 가장 큰 행사인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회사를 홍보하고 싶소. 이 벽을 다 ‘전기 그림’으로 채워주시오.”

프랑스 화가 라울 뒤피는 1937년 파리 박람회 개막을 앞두고 프랑스 전력공사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았다. 세계 각국이 첨단기술과 국력을 뽐내는 박람회 기간에 맞춰 전력공사 건물 외벽에 전기의 중요성을 알리는 그림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가로 60m, 세로 10m. 뒤피는 10개월에 걸쳐 이 거대한 벽을 ‘전기의 위대한 역사’로 채웠다. 고대 그리스 신 제우스의 벼락부터 산업화 초기의 공장과 기차, 찬란하게 빛나는 현대 프랑스의 야경까지…. 전기를 통해 발전한 인류의 문명을 특유의 밝고 경쾌한 색채로 표현했다.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를 홀린 뒤피의 걸작 ‘전기 요정’(1937)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그림을 축소해서 판화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곳곳에서 쇄도했다. 뒤피는 2년에 걸쳐 이 작품을 석판화로 제작했다.

이때 제작된 ‘전기 요정’ 석판화가 한국을 찾았다. 그것도 두 점씩이나. 서울 여의도 더현대 알트원(ALT.1)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각각 열리고 있는 뒤피 전시를 통해서다. 같은 작가의 전시가 다른 곳에서 동시에 열리는 건 이례적이다.

프랑스의 심장부 파리시립현대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전기 요정’의 매력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두 곳에 있는 ‘전기 요정’은 다르다. 원본도 같고, 크기도 비슷한데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걸까.

 ○대표작은 더현대가 ‘한수 위’

결론부터 말하면 더현대에서 볼 수 있는 길이 6m의 ‘전기 요정’이 미술사적으로 더 가치가 높다. 예술의전당의 작품은 판화지만, 더현대의 작품은 엄밀히 말하면 판화가 아니다. 판화의 밋밋한 질감을 아쉬워한 뒤피가 수년에 걸쳐 과슈 물감(불투명한 수채물감)을 덧칠한 회화 작품이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뒤피 특유의 맑은 색채와 붓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전기 요정 석판화 가운데 뒤피가 덧칠한 작품은 이게 유일하다.

이 귀중한 작품이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건 세계에서 뒤피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인 퐁피두센터가 직접 기획한 전시기 때문이다. 퐁피두센터는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과 함께 ‘프랑스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뒤피 전문가’로 꼽히는 퐁피두센터 소속 크리스티앙 브리앙 수석큐레이터가 기획을 총지휘했다.

 ○‘블랙핑크’ 도자기·타일까지

그래서인지 더현대에는 뒤피의 색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대표작이 많다. 젊은 시절 인상주의 화풍을 따라 그린 ‘생트-아드레스의 해변’(1904)부터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원색이 도드라지는 ‘분홍색 옷을 입은 여인’(1908), 파스텔톤의 푸른색이 돋보이는 ‘나무 아래 기수들’(1931~1932)까지. 퐁피두센터가 “프랑스 ‘국보급’ 소장품”이라고 할 정도의 작품 130여 점이 총출동했다.

회화뿐만 아니다. 뒤피는 당시 인테리어 분야에서도 잘나가는 디자이너였다. 검은색과 분홍색을 매치한 ‘블랙핑크’ 도자기, 집 안을 이국적인 분위기로 만들어주는 태피스트리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중 타일 작품 ‘조개껍데기를 든 목욕하는 여인’(1925)은 더현대에서 처음 공개됐다. 퐁피두센터에서도 전시된 적 없는 작품이다. 장르를 뛰어넘어 예술적 재능을 펼친 뒤피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전시장에 마네킹? 패션쇼 같은 ‘예당’

뒤피가 디자인한 패턴으로 만든 드레스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이선아 기자


‘장식 예술가’로서 뒤피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면 예술의전당으로 향하면 된다. 이 전시는 국내 전시기획사 지에이아트가 개인 컬렉터, 파리 니스시립미술관 등에서 빌린 작품 180여 점으로 구성됐다.

하이라이트는 패션이다. 전시장 한가운데에는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 17개가 쭉 늘어서 있다. 여기가 패션쇼장인지, 미술 전시장인지 헷갈릴 정도다. 모두 뒤피가 디자인한 패턴이다. 뒤피는 생전 1000개가 넘는 패턴을 만들었다. 여기에선 오트 쿠튀르의 창시자인 폴 푸아레 등과 협업한 작업 등을 볼 수 있다.

웬만해선 보기 힘든 뒤피의 수채화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뒤피의 대표작 대부분은 유화다. ‘생선접시’(1947) 등 수채화 작품에선 유화보다 한층 더 맑고 투명한 색감을 느낄 수 있다. 더현대 전시는 9월 6일, 예술의전당 전시는 9월 10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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