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희 칼럼] 튀르키예의 위험한 선택

심윤희 기자(allegory@mk.co.kr) 2023. 5. 3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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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발림 정책 앞세운
'21세기 술탄' 재선에
경제파탄 가속화 우려
포퓰리즘 못떨치면 미래없다

'튀르키예의 간디'도 포퓰리즘을 앞세운 '21세기 술탄'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지난 28일(현지시간) 치러진 튀르키예 대선 결선투표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현 대통령이 야당의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를 꺾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사망자 5만명을 낸 대지진에도, 살인적인 물가 폭등에도 민심은 '스트롱맨'을 선택했다. 20년간 집권한 그는 개헌안에 따라 30년 장기 집권의 길을 열게 됐다.

에르도안이 남긴 족적을 보면 말도 안 되는 결과다. 그는 튀르키예 국민 삶을 파탄으로 내몬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에 대한 해법은 황당했다. 물가가 치솟으면 금리를 올리는 게 상식인데 "고금리가 고물가를 부른다"는 엉터리 논리를 펴며 금리를 되레 인하한 것. 이에 반기를 든 중앙은행 총재를 3명이나 갈아치웠다. 경제 교과서와 거꾸로 간 정책의 결과는 참담했다. 리라화 가치는 2013년에 비해 10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고, 지난해 물가 상승률은 72%에 달했다. 지난 2월 튀르키예를 강타한 대지진에 대한 대응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지진에 대비해 20년간 6조원의 지진세를 걷고 내진 규제를 강화했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대지진 이후 정권 심판론이 비등했음에도 그가 권력을 연장하게 된 데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포퓰리즘. 에르도안은 연금 조기 지급, 최저임금 인상을 약속했다. 가정용 천연가스와 인터넷 데이터 무상 공급 등 퍼주기 정책도 쏟아부었다. 국민들은 포퓰리즘의 유혹을 차마 떨치지 못한 것이다. 100년 전 건국 이념인 '세속주의'(정치·종교 분리) 대신 이슬람주의로의 회귀를 호소한 전략도 먹혔다.

'21세기 술탄'은 국민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에르도안의 재선이 확정되자 리라화 가치는 사상 최저로 곤두박질쳤다. 경제 파탄이 가속화될 거란 어두운 전망투성이다. 튀르키예 민심의 선택이 위험해 보이는 까닭이다.

포퓰리즘에 중독되긴 쉬워도 후유증은 깊고도 길다. 포퓰리즘으로 흥청댔던 그리스와 중남미 '핑크타이드'(좌파 연쇄 집권) 국가들이 그 사례다.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 화폐는 휴지 조각 신세가 돼 강도가 거부하는가 하면 심지어 벽지 대신 지폐로 도배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도 1981년 집권한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좌파 정권이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주라"며 돈을 뿌리면서 재정이 파탄 났고, 결국 '유럽의 문제아'로 전락했다. 2015년 총선에서 부채 탕감과 긴축 중단 등 달콤한 공약을 들고나온 알렉시스 치프라스를 선택한 대가는 고통스러운 국가 부도였다. 그나마 그리스는 2019년 총선에서 정권 교체를 이루며 포퓰리즘과 결별을 선언했다. 최근 총선에서도 4년간 경제 회복을 일궈낸 집권 신민주주의당 손을 들어줬다. 치프라스는 이번에도 최저임금 인상, 연금 수령액 인상 등 복지 공약을 남발하며 설욕을 노렸지만 포퓰리즘의 해악을 깨달은 그리스 국민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뒤늦은 자각으로 망국의 구렁텅이에서 탈출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문제는 국내에도 포퓰리즘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 부채가 1000조원을 넘어섰는데도 재정을 망칠 포퓰리즘 법안이 넘쳐난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사탕발림 경쟁은 더 가열되고 있다. 야당은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양곡관리법에 이어 대학생 학자금 무이자 대출 등을 밀어붙이고 있다. 대학생 '1000원 아침밥' 확대에는 여야가 경쟁까지 벌이고 있다. 재정준칙 도입은 미룬 채 퍼주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형국이다. 포퓰리즘은 나라 경제를 거덜내는 망국병이다. '속이려는' 정치인과 '속으려는' 대중의 합작품이다. 국민이 눈과 귀를 열고 포퓰리스트를 판별해내지 않으면 우리도 튀르키예나 중남미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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