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독한 숨결을 화폭에 담았다"

이한나 기자(azure@mk.co.kr) 2023. 5. 3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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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세 단색화 거장 정상화
70여년간 조수없이 혼자 작업
고령토·물감 덮고 떼기 반복
40년 전속 인연 갤러리현대
7월 16일까지 40여점 전시
31일 갤러리현대에서 단색화 거장 정상화 화백이 작품 앞에 앉아있다. 갤러리현대

격자무늬 직사각형이 가득한 하얀 격자 사이사이에서 푸른 듯 붉은 듯 묘한 색이 스며 나온다. 마치 아크릴 물감이 칠해진 평면 캔버스 뒤에서 빛을 뿜어내는 조명이라도 있는 듯 묘한 느낌이다. 단색화 거장 정상화 화백(91)의 1981년 작품 'Untitled 81-2-21'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머물던 시절 이 작업을 완성한 정 화백이 무척 마음에 들어 애지중지 아껴뒀던 이 단색화를 대중에게 처음 공개했다. 정 화백과 40년 인연을 맺어온 갤러리현대에서 여는 아홉 번째 개인전 '무한한 숨결'을 빛내는 수작이다. 한 일본 평론가의 "정상화의 흰색은 무지개다"란 평도 떠올리게 한다.

신체적·정신적 수행의 단색화 거장으로 유명한 정 화백이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이후 개인전을 6월 1일 개막해 7월 16일까지 펼친다.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는 "작가의 평면을 향한 탐구정신과 치열한 실험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1970년대 이후 다양한 그리드 작품부터 근작까지 40여 점을 소개한다"고 밝혔다.

전시 제목은 작가의 모든 숨결이 닿은 캔버스 화면이 화폭 너머의 무한한 시공간으로 확장되길 바라는 작가의 세계관을 은유한다.

31일 전시장에서 만난 정 화백은 "화면 속에 말과 숨결이 담아진다. 작가에게 남아 있는 게 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조수를 안 쓰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난 사람 안 써. 나 혼자 있어야 이런 작품이 된다"고 했다.

즉 철저한 고독 속에서 작업한 결과물이다. 젊은 시절 직장에서 퇴근 후 눈을 붙이고 자정 넘어서야 일어나 새벽에 4~5시간 집중 작업했다고 전했다. 6·25전쟁 와중에 집안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던 그는 1960년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유럽의 앵포르멜(비정형회화)에 영향을 받은 한국 앵포르멜 운동의 작품 경향을 대표한다. 현대 미술가협회와 악튀엘 회원으로 활동했다. 1965년 파리비엔날레와 1967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참가작가로 선정되며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1969년 프랑스 파리에서 일본 고베로 이주해 일본을 대표하는 아방가르드 그룹인 구타이 작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그리드(직사각형 격자)' 등 본인의 작업 방식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고 1977년 파리로 건너가 활동한 지 15년 만인 1992년 귀국해 경기도 여주에서 작업에 매진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령토와 물감으로 무수한 '떼어내기'와 '덮어내기'를 통해 완성되는 과정을 다양한 매체 실험을 통해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1층에서 선보이는 'Process5'(2017)는 캔버스 위에 공간을 구축하는 재료인 고령토를 일부 남겨둬 그의 작업을 이해하기 좋다. 지하 전시장에서는 백색의 그리드 작업을 한자리에 모아 다양한 표정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격자의 간격이나 바탕 안료의 두께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로 변형된다. 2층에서 본격적으로 종이를 매체로 적극 활용한 작품들이 펼쳐진다. 한지를 미싱으로 꿰매고 여러 겹 쌓아 평면성을 탐구한 작품도 처음 선보인다. 본인의 완성된 캔버스 작품 위에 한지를 올려 연필이나 목탄처럼 탁본을 뜨는 프로타주 작품, 종이에 수직·수평 선을 그어 칼로 얇게 벗겨내 색칠하는 자유로운 데콜라주 작품도 정 화백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전시장에서 일견 엇비슷해 보였던 작품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아주 다양한 형상과 색으로 개성 가득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일견 목욕탕 타일을 연상시키는 그의 단색화는 한때 "그림은 대체 어디 있냐" 비아냥을 듣던 시절도 겪었다. 그러나 이우환은 1983년 현대갤러리에서 정상화의 첫 개인전을 보고 "세계 어디를 다녀도 이런 장인 정신을 갖고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하는 작가는 보지 못했다"고 호평했다.

"구순에 전시를 또 열지는 기대도 안 했다"는 정 화백은 "그림은 많이 볼수록 보는 능력이 생긴다"면서 "(관람객들이) 직접 와서 보고 느끼라"고 했다.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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