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만든 출판지원 사업에 “불공정·방만 운영” 칼 빼든 문체부

이영경 기자 2023. 5. 3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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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교양서 도서관 보급하는 세종도서 사업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사태 뒤
민간 위탁 권고 무시하고 내부 운영
올 도서 선정 앞두고 “구조적 수술”
···
“예산 축소 빌미” 출판계 반발에
“이번엔 예정대로···출판계와 협의해 개선” 한발 물러서
도서관에 꽂혀 있는 학술지들. 픽사베이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우수도서를 선정해 전국 도서관에 보급하는 출판지원 사업인 ‘세종도서 선정·구입 지원 사업’에 대해 객관성과 공정성을 이유로 “구조적 수술이 불가피하다”고 나섰다. 출판계가 강하게 반발하자 문체부는 “올해 예정된 사업은 진행한다”며 한발 물러섰다.

문체부는 지난 21일 보도자료를 내고 “세종도서사업을 자체 점검한 결과, 사업의 핵심인 심사·평가·선정, 심사위원의 구성·관리에 있어 객관성과 공정성의 근본적인 문제점과 운영체계·실태의 부실함과 방만함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박보균 장관은 “출판진흥원이 이를 소홀히 한 것은 치명적이며, 리더십의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낸 것으로 사업의 구조적인 수술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문체부는 자체 점검 결과 “객관성·공정성의 핵심인 심사기준 배점표·채점표가 부재”하고 “특정 단체 추천인이 과도하게 반영”되는 등 심사위원 구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세종도서사업에 대한 ‘구조조정’ 선언에 출판계는 술렁였다. 예년 같으면 벌써 공고가 나가고 선정 절차에 들어갔어야 할 사업이 지연되던 중 정부가 사업 자체를 문제 삼고 나섰기 때문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와 한국출판인회의는 성명을 내고 문체부를 비판했다. 출협은 성명을 통해 “세종도서사업의 문제 지적이 예산축소의 빌미로 전락해서는 안 될 일”이라며 “세종도서사업이 부실 운영되고 있다면 그 상황을 만든 데는 문체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세종도서사업의 현재 운영 체계는 문체부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맡겨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2018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 활동 결과, 출협은 정부 개입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세종도서사업 민간위탁을 권고했지만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출판산업진흥원 내부에 ‘민관 협동’ 방식의 운영위원회를 만들었다. 출협은 “현재의 세종도서사업의 운영방식, 체계, 심사방식은 모두 그 당시 문체부가 만들어놓은 것이며, 세종도서사업 운영위원회가 단순한 자문기구로 전락한 것도 문체부가 의도한 대로”라고 밝혔다.

윤철호 출협 회장은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이를 빌미로 출판지원 예산을 줄이려는 게 아닐까 우려된다”며 “세종도서사업 운영 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출판계와 논의해 개선해나가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세종도서사업은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도서관 책 구매 예산으로 쓰이는 것”이라며 “국민들의 필요를 위해 쓰이는 예산 성격이 더 크다”고 덧붙였다.

출판인회의 또한 “세종도서사업은 도서관 장서 확충, 독서문화 증진에 크게 기여한 사업”이라며 “출판사와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도서관 이용자 등 많은 관계자가 세종도서 선정사업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기약 없이 사업이 지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민주적으로 출판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반영해 조속히 사업을 시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2022년 세종도서 분야별 선정 현황. 출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서울 동작도서관의 경제학 서가에 10일 ‘부동산 및 주식 투자’ 관련 서적이 빼곡히 꽂혀 있다. 동작도서관 제공

출판계의 반발에 문체부는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다. 문체부 관계자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세종도서 운영상 드러난 문제점을 개선해 올해 예정된 사업을 시행할 계획”이라며 “세종도서 개선 방향도 출판계와 함께 논의해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세종도서사업은 84억원 규모의 예산으로 매년 교양부문 550종, 학술부문 400종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전국 도서관에 보급하고 있다. 지난해엔 2506곳에 43만2997권을 보급했다.

2001년 문화부 추천도서(교양 및 학술부문)로 시작된 사업은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로 정부의 부당한 개입이 드러나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진상조사위가 마련돼 민간 위탁을 권고했으나, 출판진흥원 내부에 민관 협동 방식의 운영위원회를 만드는 것으로 운영 방식이 바뀌었다.

정부가 당초 제시한 개편방안은 심의위원들이 책을 추천하면 개별 도서관이 책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알려졌다. 이런 방식으로는 대여율이 높은 인기 도서 위주의 구입이 이뤄지므로 학술·교양도서 구매가 위축될 우려가 있다.

한 학술도서 출판사 관계자는 “시민들의 요구에 따른 희망도서 구입사업으로 수서되는 책 다수가 재테크 등 경제·경영서인 현실에서 세종도서 사업은 작은 출판사 입장에선 모세혈관처럼 중요한 지원을 해주는 예산이다. 이를 통해 출판의 연속성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에서 ‘블랙리스트 사건’처럼 출판계를 옥죄고 제어하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며 “정권이 바뀌어도 출판산업은 보호해야 한다. 생각과 지식은 정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한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담보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고 덧붙였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영미권에서는 양장본으로 출간되는 학술서 초판을 거의 도서관에서 구입하기 때문에 시장논리만으로 출간될 수 없는 책들이 줄줄이 출간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재테크 도서, 더는 구입 안 합니다”···도서관의 ‘결단’ 어떻게 나왔나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5101808001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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