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과기 유공자 김성호 교수, 노벨상 불발된 사연
올해는 1953년 DNA 이중나선 구조 규명 70주년이지만 조용히 지나갔다. 70은 10년 단위의 하나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는 숫자여서일 것이다. 아마도 서구권에서 수나 양을 구분하는 큰 단위인 쿼터(quarter)에 걸리는 5년 뒤 75주년에는 제대로 챙기지 않을까.
그럼에도 1953년 논문을 실은 학술지 ‘네이처’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중나선 구조 규명에 기여했음에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과학자인 로절린드 프랭클린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사실을 소개한 기고문을 실었다.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 구조를 밝힌 제임스 왓슨은 1968년 출간한 ‘이중나선’에서 당시 프랭클린을 DNA X선 회절 사진을 찍고도 데이터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고집을 부린 히스테리컬한 인물로 묘사했다. 돌이켜보면 프랭클린은 10년 전 불과 37세의 나이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상태여서 왓슨에게는 책의 재미를 높이기 위해 부담 없이 넣을 수 있는 양념이었던 셈이다.
알다시피 영국 케임브리지대 캐번디시연구소에서 일한 왓슨과 크릭은 런런대 킹스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가 충동적으로 몰래 보여준 동료 프랭클린의 DNA X선 회절 사진을 보고 나선임을 확신하고 머리를 굴려 이중나선 구조 모형을 만들었다.
● 이중나선 해석에도 결정적 역할
영국 맨체스터대의 동물학자 매튜 코브와 미국 존스홉킨스대 의학사가 나다니엘 콤포트는 각각 크릭과 왓슨의 전기를 쓰고 있는데, 지난해 함께 프랭클린의 아카이브가 있는 처칠칼리지를 방문했다. 거기서 자료를 보고 프랭클린의 연구 과정을 재구성한 결과 저자들은 프랭클린이 그렇게 고집스럽거나 어리석지 않았으며 오히려 데이터 해석에서도 정답에 거의 근접했지만 고립된 상태에서 동료나 전문가의 적절한 피드백을 받지 못해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이중나선 발견에는 프랭클린의 X선 사진뿐 아니라 직후 크릭의 지도교수였던 막스 페루츠가 킹스칼리지의 연구현황 보고서를 읽고 프랭클린의 중요한 발견, 결정이 ‘C2 대칭’이라는 사실을 크릭에게 알려줬고 크릭은 ‘DNA 이중나선이 반대 방향으로 감겼다’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훗날 페루츠는 킹스칼리지 연구자들의 동의 없이 보고서 내용을 흘린 행위를 후회한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만일 프랭클린이 요절하지 않고 DNA 이중나선 규명 업적에 노벨상이 주어진 1962년에 살아있었다면 수상자 선정에 대한 논란은 갈수록 커졌을 것이다. 노벨상은 세 명까지 줄 수 있으므로 십중팔구 프랭클린을 뺀 세 사람이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왓슨과 크릭의 1953년 논문에는 프랭클린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프랭클린은 결정적인 데이터와 해석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때 이른 죽음으로 논란의 씨앗까지 없애준 게 아닐까. 결과적으로 두 과학자의 욕심이 통한 셈인데 뒷맛은 쓴다. 다만 그동안 몰랐거나 간과된 사실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명성이 예전만 못하고 앞으로도 좀 더 떨어질 것 같아 약간은 위안(?)이 된다.
그런데 최근 과학자의 욕심이 결국 자신의 명성에 큰 흠집을 남기고 어쩌면 노벨상도 놓친 걸로 보이는 사례를 알게 됐다. 게다가 본인뿐 아니라 자기 실험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6년 동안 연구를 이끈 과학자까지 피해를 본 것이다. 게다가 이 젊은이는 한국 유학생이었다. 바로 김성호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화학과 명예교수다.
●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돼
김 교수는 1966년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X선 결정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MIT 알렉산더 리치 교수팀에 박사후연구원으로 들어가 당시 관련 학계의 핫한 이슈였지만 진전이 없었던 전달RNA(tRNA) 구조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는 2년 만에 tRNA 결정을 만드는 데 성공해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어 고품질 결정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해 1973년 tRNA가 알파벳 ‘L’자 형태의 골격임을 밝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결과를 다룬 기사가 뉴욕타임스 1면에 실렸을 정도였다. 이어 1974년 학술지 ‘사이언스’에 모든 구성 원자의 위치를 지정한 고해상도 tRNA 구조를 발표해 8년 연구의 대장정을 마쳤다.
1950년대 DNA와 단백질 구조 규명(둘 다 노벨상을 받았다)에 이어 RNA의 구조를 처음 밝힌 것이기 때문에 노벨상이 유력해 보였지만 결국 불발됐다. tRNA의 구조를 밝혀 그 작동방식을 명쾌히 알게 된 건 분자생물학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임에도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제6회 ‘과학기술유공자’ 헌정식이 5월 30일 열렸다. 지정된 유공자 4명 가운데 한 사람이 김성호 교수로 헌정식 참석차 우리나라에 왔다. 지난주 김 교수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1974년 논문을 둘러싼 우선권 논란이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과학자도 인간”이라며 간단하게 전후 사정을 설명한 뒤 자세한 건 크릭과 리치 사이에 오간 편지를 읽어보면 알 거라고 말했다. 크릭이 남긴 모든 편지가 공개된 아카이브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날 인터넷에서 검색해 크릭의 문서와 사진 파일을 보관한 아카이브에 들어가 ‘Alexander Rich’를 넣자 문서 18건이 떴다. 이 가운데 편지는 11통이었고 8통이 1974년 tRNA 논문과 관련된 것이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김 교수와 리치가 엄청난 업적에도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게 수긍이 됐다. 그런데 여기에 왜 뜬금없이 크릭이 나올까.
● 어뎁터 가설에서 존재 예측
사실 크릭은 tRNA의 대부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일찌감치 tRNA의 존재를 예측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DNA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진 직후 과학자들의 관심은 염기서열 정보가 어떻게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로 이어지는가를 밝히는 데로 옮겨갔다. 염기는 4가지이고 아미노산은 20가지였기 때문에 짝이 안 맞았다.
그런데 1954년 빅뱅 이론을 제안한 러시아 출신의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가 끼어들었다. 생물학 지식은 없었지만 정보의 관점에서 접근한 가모브는 염기 3개가 한 단위가 돼야(4의 3승은 64) 20가지 아미노산의 정보를 지정할 수 있다는 ‘유전부호 체계’를 제안했다. 이에 감명을 받은 왓슨과 크릭은 가모브를 만나 의기투합한 뒤 ‘RNA 타이 클럽’을 만들었다.
당시 DNA 정보가 단백질 정보로 해석되는 과정에서 RNA가 개입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기에 과학자 20명을 회원으로 받아 각각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RNA를 찾아보자는 취지였다. 알렉산더 리치도 회원 가운데 한 명이었고, 왓슨과 1년 동안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RNA 구조를 밝히는 연구를 하기도 했다.
RNA 매개 과정에 대해 숙고하던 크릭은 DNA 정보를 지닌 RNA(훗날 전령RNA(mRNA)로 불림)가 아미노산이 연결돼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도 직접 관여하는 건 무리라고 보고 이 일을 하는 별도의 작은 RNA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 메모를 1955년 1월 회원들에게 돌렸다. 개별 아미노산이 결합된 작은 RNA가 염기서열 정보를 지닌 RNA에 결합해 그 순서대로 아미노산이 연결된다는 것이다. 크릭은 이 RNA를 어뎁터(adaptor)라고 불렀다.
수년 뒤 어뎁터에 해당하는 분자인 tRNA의 존재가 드러나자 학계는 깜짝 놀랐다. 그 뒤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이 과정의 정확한 메커니즘을 알 수 있는 tRNA 구조 규명 연구에 뛰어들었지만 결정조차 만들지 못해 고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알렉산더 리치는 하버드대에서 생화학을 공부한 뒤 1949년 전설적인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의 실험실에 박사후연구원으로 들어가 5년 동안 머무르며 X선 결정학을 익혔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폴링과 쓴 논문이 한 편도 없다.
이에 대해 폴링은 “이 친구가 한 일은 별로 없지만 많이 배웠을 것”이라고 촌평했다. 그 뒤 영국으로 건너가서는 성과를 내, 1955년 크릭과 함께 콜라겐 단백질의 구조를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 왓슨과 RNA 연구에 뛰어들었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다.
● 마지막 단계에서 독점욕에 굴복
1958년 MIT에 부임한 이후에도 RNA 연구를 이어나가 원핵세포에서 mRNA에 리보솜이 줄줄이 달라붙어 번역을 하는 복합체인 폴리솜(polysome)을 규명하는 등 성과가 있었지만 X선 결정학 연구에는 진전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1966년 김성호 박사가 들어왔고 당시 실험실에서 수년째 해결하지 못하던 다른 결정의 X선 데이터 해석 문제를 어렵지 않게 풀자 tRNA 구조 규명 프로젝트를 전권을 주고 맡겼다. 리치를 비롯해 실험실 사람들 다수는 생화학을 전공한 뒤 X선 결정학을 배운 반면 김 박사는 물리화학자로 석사 때부터 X선 결정학을 연구했기 때문에 이런 차이를 리치가 알아본 것이다.
그 뒤 김 박사가 이끄는 tRNA 팀이 놀라운 성공을 이어나가면서 과거 동료들의 영광을 지켜봐야만 했던 리치도 무대의 중심에 섰다. 이런 와중에 1972년 김 박사가 듀크대에 자리를 잡으면서 변화가 생겼다. 당시 고품질 결정의 X선 회절 사진을 얻은 상태에서 자칫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해석 오류를 막기 위해 두 사람은 각자 독립적으로 해석을 하며 결과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일하기로 했다. 그 결과 tRNA 골격이 ‘L’자라는 같은 결론에 이르렀고 확신에 차 1973년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제 추가 데이터를 얻어 수소 등 나머지 원소들의 위치만 정하면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시점에서 리치 교수가 ‘명성의 독점’이라는 유혹에 걸려든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MIT 팀에서 데이터 해석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느낀 김 교수가 책임자에게 묻자 교수의 지시였다는 말을 듣고 따졌지만, 리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펄쩍 뛰었다. 그럼에도 사실상 연구는 따로 진행돼 각자의 길을 가면서 최종 구조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났다.
1974년 초 리치는 김 교수의 반대를 무시하고 MIT의 모델로 논문을 써 3월 1일자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김 교수도 저자로 이름을 올렸지만, 7명 가운데 기여도가 가장 적은 6번째(맨 마지막은 교신저자이므로)로 사실상 전관예우였다. 그 뒤 김 교수는 듀크대의 모델로 마무리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다음 달 매디슨 위스콘신대에서 tRNA 학회가 열려 리치 교수가 초청 연사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김 박사는 발표할 때 듀크팀 모델도 언급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아니면 본인이 보충 연설을 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지만 둘 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학회에 참석한 영국 케임브리지대 의학연구위원회(MRC)의 연구자들이 리치의 발표를 듣고 자신들의 모델과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깜짝 놀란 리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알아본 결과 MRC 그룹도 tRNA 구조 실험을 마무리하고 논문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리치는 김 박사에게 연락해 듀크팀의 모델로 빨리 논문을 쓰자고 재촉했고 부랴부랴 마무리해 ‘사이언스’에 보냈고 8월 2일자 게재가 확정됐다. 반면 MRC의 논문은 이보다 2주 늦은 8월 16일 ‘네이처’에 실리게 됐다.
● 오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당시 케임브리지 MRC에서 tRNA 구조 규명 연구를 이끌고 있던 아론 클루그는 MIT와 듀크대가 자신들보다 2주 앞서 논문을 발표할 거라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 상사인 크릭에게 알렸고 크릭은 즉각 리치에게 분노에 담긴 편지를 쓴다. 리치가 학회에서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빼냈을 거라고 추측했다. 7월 31일자 크릭의 편지는 짧은 분량이라 전문을 소개한다. 크릭이 8년 연상이고 서로 잘 아는 사이라 반말투로 옮겨봤다.
“친애하는 알렉스, 자네 이름에서 악취가 풍기는군. 아론은 자네가 구조의 세부 사항을 구슬려 알아낸 뒤 자네의 결과로 출판하려 한다고 확신하네. 바로 자네가 한 짓 아닌가. 자네가 이미 같은 방향으로 어느 정도 진행한 건 알고 있지만, 자네가 매디슨 학회에서 공식적으로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과 김(성호)이 고든컨퍼런스에서 (MRC 논문의 1저자인) 로베르투스에게 케임브리지 구조의 세부 사항을 받은 사실은 그대로네.
자네들이 케임브리지 구조에서 얻은 지식이 없었다면 개선된 구조를 출판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걸세. 더구나 자네는 케임브리지 연구에 대한 기본적인 감사조차 언급하지 않았지. 거기에다 ‘사이언스’에 대한 자네의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해 출판을 앞당긴 건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짓이네.
자네가 공적으로 적절한 사과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자네가 케임브리지를 방문하더라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야만 하겠네. F. H. C. 크릭”
크릭의 편지를 받고 화들짝 놀란 리치는 김 교수에게 연락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듀크팀이 독자적으로 MRC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동봉한 11쪽에 이르는 장문의 답장을 8월 9일 보냈다.
편지에서 리치는 “3월 ‘네이처’ 논문은 예비 결과이고 불행히도 심각한 실수가 있었다”며 “당시 독립적으로 모델을 만들던 (김)성호가 이를 지적했지만 반영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리치는 “논문에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분명히 언급했다”면서도 “한 달 반 중국 출장이 잡혀 있어 서둘렀다”고 인정했다.
이어서 리치는 “듀크에서 (김)성호는 데이터를 해석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 집중해 신호 대 잡음 비율은 늘릴 수 있었다”며 이에 대한 논문을 3월 26일 미국결정학회가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성호는 4월 여러 학회에 참석해 tRNA 구조(듀크 모델)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크릭이 언급한, 로베르투스가 보낸 논문 초안을 성호는 8월 5일에야 받았다”고 덧붙였다.
리치는 “4월 학회에서 MRC가 tRNA 고해상도 구조를 밝히려고 씨름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몰랐다”며 억울해했다. 그는 “이 일에 관여한 사람 대다수는 오랜 가까운 친구로 난 동봉한 자료가 이 불행한 오해를 해소하기를 바란다”며 “데이비드 블로우와 막스 페루츠에게도 편지 사본을 보내고 당신의 답장을 고대한다”며 편지를 마무리했다. 참고로 블로우는 페루츠 실험실에서 1959년 헤모글로빈의 구조를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했고 페루츠는 이 업적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답장과 함께 동봉한 자료를 클루그와 검토한 뒤 9월 4일 보낸 편지에서 크릭은 “메디슨 학회 무렵 김(성호)이 (8월 2일자)‘사이언스’에 제안한 모델에 상당히 근접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도 “4월에 이미 새 모형이 낫다는 걸 명백히 알았다면 왜 좀 더 일찍 출판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제삼자가 보기에 자네가 김(성호)의 해석이 영국팀에서도 지지받는다는 걸 깨닫고 나서 출판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크릭은 이어 “자네는 이미 과학계에서 명성을 이루었고, 나는 자네가 타인의 아이디어와 영향력을 제대로 평가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비단 다른 실험실의 연구뿐 아니라 자네 연구팀의 젊은이들에 대해서도 말일세”라고 지적했다.
● 영국 과학잡지가 스캔들로 다뤄
이 편지에 대해 리치는 10월 11일에야 답장을 보냈는데, “김성호가 어머니를 뵈러 한국에 가서 그와 상의하지 않고는 답장을 쓸 수 없다고 느꼈다”며 아직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크릭에게 “MRC의 로베르투스에게서 4월에 결과가 마무리됐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당신들은 더 일찍 논문을 쓰지 않았냐?”며 반박하기도 했다.
리치는 “최근 (영국 과학잡지) ‘뉴사이언티스트’의 기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며 “기사에서 MRC가 자신들의 모형을 메디슨 학회에서 자세히 알려줬다고 언급했다”며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불평했다. 그 뒤 연구의 독립성을 입증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줄줄이 나열한 뒤 끝부분에 다시 ‘뉴사이언티스트’ 기사를 언급했다.
“‘뉴사이언티스트’는 여기(미국)서도 많이 보는 잡지라 몇몇 친구들이 내게 기사 내용이 맞는 건지 물었다”며 “내가 보기에는 아론이 우리 편지의 내용을 선택적으로 흘린 것”이라고 불평했다. 리치는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뉴사이언티스트’에 장문의 자세한 답변을 보내는 게 맞는 건지 지금 논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크릭은 이 편지를 읽고 쓴 10월 22일자 편지에서 “처음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편지를 써 미안하다”며 “‘뉴사이언티스트’ 기사는 가장 불행하고 괘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알다시피 막스(페루츠)는 기사를 막으려고 했고 당시 나는 외국에 있었다”고 발뺌했다.
12월 5일 보낸 편지에서 크릭은 “자네 제안대로 (항의 또는 정정 요구) 편지를 ‘뉴사이언티스트’에 보내야 할지 막스(페루츠)와 상의했다”며 “하지만 난 결국 반대했는데, 그냥 두면 잊힐 문제를 건드리면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끌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썼다.
이어서 크릭은 “자네가 유일하게 상처받은 사람이라고 자신 확신을 하는 짓을 그만두기 바란다”며 “김(성호)이 현재 구조를 향한 먼 길을 독립적으로 갔다는 데 지금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고 힐책했다.
크릭은 “자네 개인에 대한 비난의 초점은 자네가 매디슨 학회에서 새(듀크팀) 모델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게 아니라 청중들에게 옛(MIT팀) 모델만을 얘기한 데 있다”며 “당시 상황을 알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김(성호)의 새 모델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더군”이라고 덧붙였다.
● 클루그는 다른 업적으로 받아
만일 1973년 tRNA 뼈대 규명 논문이 뉴욕타임스 1면에까지 실릴 정도로 큰 관심을 받지 않았다면 리치가 구조 완성자의 명성을 독점하려는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공동연구를 이어갔을 것이고 1974년 3월 ‘네이처’ 논문 대신 완성도가 높은 듀크팀의 모형으로 논문을 썼을 것이다. 최소한 매디슨 학회에서 발표할 때 듀크팀의 모형에 대해 언급만 했어도 우선권 논쟁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고해상도 구조 규명 논문이 영국 MRC보다 먼저 나왔다면 김성호 교수와 함께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고 설사 MRC에 역전됐더라도 두 사람과 아론 클루그가 공동 수상하지 않았을까. tRNA는 1955년 크릭이 제안한 어뎁터의 실체인데다 리치는 RNA 타이 클럽의 정회원이었고 크릭과 공동연구로 콜라겐 단백질 구조도 규명했다. 분자생물학의 개척자들이 큰 업적을 낸 과거 동료를 얼른 노벨상 수상자 클럽에 끼워주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선권 논쟁을 겪으며 크릭과 페루츠 같은 학계의 거물들이 리치를 경멸하게 되면서 그가 포함될 업적에 노벨상을 줄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대단한 업적이라도 ‘뉴사이언티스트’처럼 많은 사람이 보는 잡지에 스캔들로 언급된데다 오보였다는 정정 기사도 없었기에, 세 사람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순간 언론의 먹잇감이 될 게 뻔했다.
tRNA 구조 규명이 있고 8년이 지난 1982년 아론 클루그는 전자현미경으로 핵산-단백질 복합체의 구조를 규명한 업적으로 노벨화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크릭과 페루츠 라인인 클루그는 다른 업적으로 보상을 받은 셈이다. 그래도 혹시나 한 희망이 사라진 순간이다. 1990년대 초 한동안 노벨상 시즌이 되면 국내 언론은 김성호 교수를 유력한 후보로 거론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헛된 바람이었다.
2015년 리치가 90세로 타계하자 ‘네이처’에 부고가 실렸는데, tRNA 구조 규명에 대해서는 짧게 언급했다. 대신 이와는 생물학적 의미가 비교도 안 되는, 소위 왼손잡이 DNA라고 부르는 ‘Z-DNA’ 구조 규명이 대표 업적으로 언급됐으며 함께 실린 인물 사진도 Z-DNA 모형을 앞에 둔 모습이었다.
반면 학술지 ‘생화학과학의 경향’에는 좀 더 긴 부고가 실렸다. 여기서는 리치의 ‘위대한 발견’ 9건을 선정했는데, 그 가운데 3건이 tRNA 발견으로 1968년 결정을 만든 연구, 1973년 뼈대 규명, 1974년 고해상도 구조 규명(그런데 3월 ‘네이처’ 논문을 뽑았다)이다. 부고에 실린 사진도 노년의 리치가 tRNA 뼈대 모형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리치의 표정이 복잡해 보인다.
크릭은 리치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말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여기서 ‘누군가’는 그와 왓슨이고 ‘자신들’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일 수도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난 개인적 경험으로 누군가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느낄 수 있게(그게 맞든 틀리든) 만드는 상황이 아주 심각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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