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골프와 파도타기의 공통점
[골프한국] 미국에 '골프 너트 협회(The Golf Nut Society)'란 단체가 있다. 견과류를 의미하는 nut는 무언가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을 뜻한다. 프로선수가 아니면서 광적으로 골프 사랑에 빠진 골퍼들의 모임이다. 1986년 설립된 이 협회는 골프에 미친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소정의 테스트를 거쳐 가입할 수 있다. 당연히 골프 중독증세가 중증 이상이어야 한다.
자신의 골프 사랑, 골프 중독의 정도를 상세히 기록해 제출하면 협회에서 포인트를 부여한다. 주어진 포인트를 계산해 '오늘의 골프 너트' '이 주일의 골퍼 너트' '이 달의 골프 너트'를 발표하고 연말에 대망의 '올해의 골프 너트'를 선정한다. 누적 포인트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Certified golf nut'라는 명예 칭호가 주어진다. '협회 인정 골프광'이다.
'올해의 골프 너트'로 선정된다는 것은 골프로선 최고의 영예다. 골프 인구나 골프코스 등 세계 최고의 환경을 갖춘 미국에서 '올해의 골프 너트'로 선정되면 단번에 매스컴을 타고 유명인사가 된다. 미국 농구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인정받는 마이클 조던은 농구를 하면서도 골프에 미쳐 이 협회가 창립되자마자 회원으로 가입, 3년 후인 1989년 '올해의 골프 너트'로 선정되기도 했다.
서핑(Surfing)에 빠진 사람들에게 골프의 중독성을 이야기하면 코웃음 치기 십상이다. 골프 중독자의 사례는 주변에서 수없이 보고 듣는다. 일상에서 잠시 일탈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휴직하고 동남아에서 몇 달씩 골프를 즐기거나 북미 일주 골프여행을 감행하는가 하면 세인트 앤드류스 올드코스 등 골프의 고향 스코틀랜드의 골프코스들을 순례하는 등 보통 골퍼로선 엄두도 못 낼 일을 저지르는(?) 용기와 배짱을 지닌 사람들이다.
가끔 접하는 서핑 애호가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그 중독성은 골퍼 애호가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뒤지지 않는 것 같다. 틈만 나면 바다를 찾고, 바다를 보면 파도를 관찰하고, 좋은 파도를 만나면 서슴없이 한 몸이 되고 마는 열정은 소름 돋을 정도다. 국내의 해안을 섭렵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매년 휴가철마다 하와이, 캘리포니아, 호주, 남아공, 필리핀, 인도네시아, 남태평양과 카리브해 등지의 세계적 서핑 명소를 찾기도 한다. 서핑이 너무 좋아 하던 일을 접고 아예 서핑 관련 직업(서핑 장비 대여 및 수리, 강습 등)을 선택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골프와 서핑은 중독성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접근하는 과정과 정신자세, 쾌감의 강도, 끊임없는 도전을 자극하는 속성 등이 너무도 닮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서핑의 문외한인 나는 우연히 동네 도서관에서 '파도수집노트'라는 책을 발견하고 단숨에 읽었다. 오십 평생을 방구석 생활자로 살던 만화가 이우일이 파도타기에 매료되는 과정을 담백하게 털어놓은 에세이다. 이우일과 부인 선현경의 파도 타는 재미에 빠진 이야기가 경쾌한 삽화와 함께 재미를 준다.
대학 졸업 후 만화가로 살던 이우일은 50이 넘어 파도타기에 빠졌다. 그의 파도타기는 구체적으로 보통 서핑보드보다 작은 보디보드(별칭 부기보드)를 타는 것이다. 보디보드는 서핑보드보다 길이가 짧아 보드에 몸을 엎드려 밀착한 자세로 파도를 타는 스포츠다.
전공과 하는 일이 같은 부부는 하와이에서 일 할 기회를 얻어 자연스레 파도타기에 이끌린다. 그 과정을 부인 선현경이 먼저 '하와이하다'는 제목의 책으로 냈다. '파도 타고 글 쓰고, 파도 타고 그림 그리고, 여행과 일상의 사이 그 어디쯤 조금 긴 하와이살이'를 담았다. 선현경의 파도타기는 부표에 몸을 의지해 물 위에 떠 파도에 몸을 맡기는 수준이었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파도타기의 묘미에 빠졌다.
이우일은 파도타기에 중독되는 이유로 어린 시절 해질녘까지 '한 번만 더'를 외치며 타던 미끄럼틀과 비슷하다고 했다. 경사면을 주르륵 타고 내려올 때의 그 즐거움을 안다면 아이들이 미끄럼틀에 중독될 수밖에 없듯 파도타기도 스키, 스케이트보드, 썰매, 스노보드와 함께 비슷한 중독성이 있다고 봤다, 파도타기가 다른 탈것들과 다른 점이라면 타고 내리는 경사면이 물로 되었다는 것뿐이다.
'경사면이 물'이라는 데에 파도타기의 핵심이 있다. 물로 된 경사면이라 아무리 넘어지고 고꾸라져도 크게 다치지는 않는다. 물에 거꾸로 쳐박혀도 짠물만 좀 먹을 뿐 물리적인 타격은 거의 없다. 또 다른 파도타기의 경이는 경사면이 계속 움직이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시시각각 움직이는 물의 언덕은 처음엔 적응하기 무척 어렵지만 일단 그 원리를 깨닫고 즐기다 보면 엄청난 놀이기구로 변한다고 털어놨다.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은 파도타기의 중독성이 골프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다가오는 파도를 빤히 보고도 그것이 정작 코앞에 다달았을 때는 도무지 붙잡거나 올라탈 수가 없었다. 파도는 마치 내가 거기에 없는 것처럼 나를 통과해 지나갔다. 보통의 인간은 물을 맨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다. 액체로 이뤄진 파도에 올라타려면 너울의 리듬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하지만 그건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몇 번이고 시도해도 출렁이는 바다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 파도가 내 몸을 스치는 찰나에 느껴지는 그 허전함이란. 파도를 타기 위한 나의 의미 없고 부질없는 몸부림, 물이 다가와 나를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은 너무나 짧고 덧없었다. 나의 무모한 몸짓은 무엇이든 꼭 움켜쥐려는 욕심으로 가득한 내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파도, 그것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연기와 같고 어쩌면 신과도 닮았다. 그래서 감히 파도와 대면하는 것 자체가 가당찮은 짓 같았다.'
기대와 의욕으로 라운드를 시작해 천변만화하는 상황과 씨름하다 자학과 탄식으로 마지막 홀을 빠져나오는 골퍼와 무엇이 다른가.
이밖에도 파도를 기다리는 장소와 때를 판별해내는 일, 그때를 기다리는 인내심, 좋은 파도를 읽는 눈, 주변 서퍼들과의 소통력, 눈에 보이지 않는 물밑을 읽는 주의력, 여기에 장시간 기다리다 험한 파도를 타는데 필요한 체력 등은 라운드를 돌 때 필요한 것들과 무엇이 다른가.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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