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타들어 가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한겨레 2023. 5. 3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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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픽사베이

이현주 목사님께서 경기도 광주 ‘지금여기교회’에서 매달 1회 노자 강의를 시작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교재는 이현주 목사님의 저서 <노자소감(老子所感)>이라고 한다. 두말없이 참여하기로 맘먹었다. 교회에 들어서니 스승님인 이현주 목사님과 교우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지난번 헤어지면서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하며 강의 <노자 소감>’의 운을 띄우셨다. 그 질문에 한 분이 “‘살아 있으면 또 만나자!’라는 인사였습니다.”라고 말하자 스승님은 밝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예, 맞습니다. 안 죽어 살아 또 만났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살아야 하겠다면 살 수 있냐고요. 마음이나 의지가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까. 삶은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죽음은 어때요. 죽음은 다릅니다. 그만 살겠다고 자살을 시도한다면 가능합니다. 그것도 하느님이 허락하셔야 하지만. 하느님은 때에 따라 허락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산다는 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이 살려 주셔야 살 수 있습니다. 이렇듯 모든 일은 하느님의 허락에 달려 있습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모는 젖먹이를 돌봅니다. 이 사실을 아이가 알까요. 모릅니다. 세월이 흘러 이러저러한 일 겪고 아이가 성장하면 부모가 자신을 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노자(老子)는 이 사람을 ‘영아(嬰兒)’라고 했습니다. ‘늙은 젖먹이’입니다. 성숙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엄마가 없으면 아이가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한순간 한순간 하느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자신이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이래도 저래도 항시 고맙다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순천사랑어린배움터에서 이현주 목사님과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배움터 공동체원들. 사진 순천사랑어린배움터 제공

제 아버지는 35살에 돌아가셨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지요. 아버지 기억이 별로 없지만 몇 말씀은 기억합니다. 많이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중 하나, “쌀 한 톨에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들어 있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자라면서 이해했습니다. 쌀 한 톨을 함부로 버리면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논에 빛, 바람, 물, 양분에 사람이 보태져야, 쌀이 우리 입에 들어옵니다. 빛과 바람은 하늘을, 물과 양분은 땅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귀중합니까. 가능한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음식을 남겨도 불편합니다. 절에서 밥 먹는 일을 공양(供養)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공(供)’은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는, ‘양(養)’은 기른다는 뜻입니다. 밥을 먹는 일은 내 안에 있는 어린 부처님을 자라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어요.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이는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입니다. 먹고 먹혀야 하나가 됩니다.

의식하는 삶과 무의식의 삶은 무엇이 다릅니까. 감사의 차이입니다. 자신이 젖 먹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어머니를 잊지 못합니다. 항상 감사합시다. 어떤 상황이 부딪혀도 감사합시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면 잘못된 말입니다. 사과나무에서 딸기를 딸 수 있습니까. 일어난 것을 보고 한탄하면 안 됩니다. 되니까 일어났습니다. 손해 보는 일이 알고 보니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불행이 사람에게 새로운 길로 인도하는 신비를 많이 보았습니다.

3,000여년 전의 글 노자의 도덕경을 지금도 전 세계가 많이 읽고 있습니다. 노자를 왜 읽어야 합니까.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인가를 찾으려면 안에 스며들어 가야 합니다. 노자를 읽던 사람이 노자를 가르친 사람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노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안에 살아 숨 쉬고 호흡하듯.

젊었을 때 저는 상당히 고약했습니다. 눈꼴이 많이 올라갔었지요. 지금은 많이 변했습니다.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한번은 목회자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한 목사가 승용차를 포니에서 소나타로 바꿨다고 자랑했습니다. 난 너그럽게 봐주지 않았어요. 곧바로 말했습니다. 덩치가 커서 좋냐고, 너만 좋으면 좋냐고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제가 너무 했지요. 노자는 물처럼 사는 것이 가장 잘 산 삶이라고 했습니다. 물처럼 살아야 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은 내려가고 내려갑니다. 동시에 물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포용합니다. 간디도 “앞서간 사람이 뒤따라가는 사람을 재촉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도덕경 4장에 ‘화기광 동기진(和其光 同其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빛이 부드러워져 뻔쩍거리지 않아 티끌과 합해집니다. 예수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찬란한 빛이 가리어 티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옷차림이나 모습이 다릅니다. 예수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빛이 가리어 티끌로 바뀌었습니다. 진정한 지자(知者)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모습에서 안에 있는 빛을 찾아야 합니다.

재미있는 콩트입니다. 뜻있는 젊은이가 창녀들을 돕기 위해 창녀촌에 갔다가, 나중에 유명한 포주가 되었다니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빛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빛에 티끌이 묻어 있습니다. 스스로 탁해져서 탁한 것은 맑은 물로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풀을 노래하던 사람이 풀처럼 살다가 풀이되는 이치입니다. 노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위자연(無爲自然)입니다. 사람이 힘을 들이지 않는 본디 자연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않고 가만히 있음도 사는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모두 일을 하는데 일삼아 무엇을 하지 않는다, 대단한 일이지요.

장일순 선생. 사진 <한겨레> 자료

송나라 선승 차암수정(此菴守淨)의 시를 소개합니다.

유수하산비유의(流水下山非有意)

편운귀동본무심(片雲歸洞本無心)

인생약득여운수(人生若得如雲水)

철수개화편계춘(鐵樹開花遍界春)

시시비비도부관(是是非非都不關)

산산수수임자한(山山水水任自閑)

막문서천안양국(莫問西天安養國)

백운단처유청산(白雲斷處有靑山)

개울물이 산 아래로 흘러가는 것은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조각구름 마을에 드리움은 별다른 생각 없는 무심함입니다. 자연현상입니다. 새는 새고, 바위는 바위입니다. 눈아 내가 너로 본다. 귀야 내가 너로 듣는다. 입아 내가 너로 말한다.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관옥아 내가 너로 산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이러한 모습으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테레사 성녀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잡힌 몽당연필이다.”라고 했고, 신께 바친 노래 ‘카탄잘리’를 쓴 타고르는 “나는 소중한 존재라 하느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일이 구름과 물 같다면 무쇠나무(鐵樹)에 꽃이 피어 온 누리에 봄이 가득합니다. 옳다, 그르다 도무지 관계없고 산산, 물물이 스스로 한가합니다. 서방 극락세계 어디냐고 묻지를 말게. 흰 구름 걷히면 그대로 청산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식욕, 색욕, 재욕, 명예욕, 수면욕,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이 시시때때로 움직입니다.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사라질 뿐입니다. 그냥 그렇게 흘러갈 뿐입니다. 유수하산(流水下山)입니다. 사람이 만약 무위(無爲)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쇠나무에도 꽃이 피니 온 세계가 극락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은 도덕경 5장에 나오는 ‘천지불인(天地不仁)’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유별나게 누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집안일을 했다면 남편이 알아주냐, 마냐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늘과 땅은 사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하는 뜻도 너도 그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위자연으로 살아갑시다. 내가 원하고 하늘이 허락하면 가능합니다. 아프면서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작은 꽃 소화 테레사 성녀는 육신의 고통을 선물로 받아들이며 살았습니다. 아프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도덕경 6장에 ‘곡신불사 현빈지동(谷神不死 玄牝之同)’이 나옵니다. 곡신(谷神)’은 도(道)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계곡의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계곡엔 항상 봉우리가 있습니다. 곡(谷)이 없이 산(山)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골짜기는 감춰져 있으면서 산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산의 뿌리가 골짜기입니다. 즉 골짜기는 바탕의 근원인 어머니이고 봉우리는 자식입니다. 순서가 뒤바뀌면 뒤죽박죽이 됩니다.

무위당(無爲堂) 장일순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원주에서 무위당 서화전이 개최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축하하러 왔습니다. 선생님은 전시장 한가운데서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 문 한쪽 구석에 말끔한 한복을 차려입고 조용히 앉아 있는 여성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분이 오늘 무위당 선생님을 있게 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야말로 노자가 말한 곡신(谷神)은 무위당의 아내 이인숙 여사님이셨습니다. 여사님이 아니었다면 무위당은 없었을 것입니다. 무위당 선생님의 장례식 때도 1박 2일을 했는데 선생님은 정말 잘 살다 가신 분이 분이셨습니다. 지학순 주교 등 훌륭한 분들이 조문을 왔습니다. 하지만 세상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많은 사람이 선생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렇듯 정말 선생님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대하신 공평한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뿌리가 되는 곡(谷)은 비어 있습니다. 비어 있으므로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계곡의 신은 비어 있으며 움직입니다. 단지 비어 있음이 아닌 비어 있으므로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따로 이름 붙일 때 노자는 ‘현빈(玄牝)’이라 했습니다.

‘빈(牝)’은 암컷입니다. 음(陰)이며 골짜기란 뜻입니다. ‘현(玄)’은 그윽하다, 신비하다는 뜻입니다. 바로 신(神)의 속성입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습니다. 봉우리는 양(陽)이요 골짜기는 마르지 않는 샘, 음(陰)입니다. 남자의 심벌보다 여자의 그것이 직접적인 생성의 모체이기 때문에 ‘암컷’이 천지의 뿌리입니다.

이렇게 노자는 도(道)를 신비한 ‘암컷’에 비유하고 여성적인 것을 자주 언급했습니다. 때로는 물을 인용해 ‘부드럽고 유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라며 도의 작용을 상찬했습니다. 노자가 곡신(谷神)이란 표현을 사용한 이유입니다. 그런 여성성이 드나드는 문은 천지의 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계곡은 받아들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인 만큼 내놓습니다. 거울과 같아서 사물이 다가오든 사라지든 개의치 않습니다. ‘현빈지문(玄牝之門)’은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생산합니다. 그렇습니다. 만물을 받아들이니까 내놓을 수 있습니다. 계곡은 가뭄이 들어 세상이 모두 타들어 가도 마르지 않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낮은 곳으로 임하는 계곡의 정신이야말로 가장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의 원천입니다. 노자는 부드럽고 겸손함이 강하고 경쟁력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픽사베이

노자가 꿈꾸었던 위대함은 근엄하고, 군림하고, 강압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부드럽고, 낮추고, 따뜻한 계곡의 정신입니다. 센 것이 오래 가고 경쟁력 있을 것이란 잘못된 생각이 팽배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부드러움과 낮춤의 계곡 정신이 어떤 시절보다 돋보이는 시대입니다. 끝으로 세상의 하층에서 고군분투하는 분들이 물이 흐르듯 순리적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는 세상을 꿈꾸며 이 강의를 마칩니다.

어딘가 안타까움이 묻어 있는 그렁그렁한 눈망울과 진정성과 간절함을 담은 차분한 어조로 2시간이 훨씬 지난 귀한 강의였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내면의 울림에 흠뻑 젖었다. 나는 매일 밤 스승님의 한숨과 신음을 들으며 잠자리에 든다. 당신의 한숨은 우리를 걱정하기 때문일 것이고, 당신의 신음은 무위자연을 역행하는 세상에 대한 개탄이실 것이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관옥 선생님과 만남을 종종 생각한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하느님의 오묘한 계획과 깊이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섭리에 먹먹해지는 기분이다.

글 최백용(사랑어린배움터 공동체원)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 사랑어린배움터 마루(대표)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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