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내전 상징 ‘유조선 세이퍼’, 좌초 8년 만에 구조된다
100만 배럴 이상 원유 저장한 채 표류
사우디-이란 화해 계기로 구조 급물살
예멘 내전 여파로 무려 8년간 홍해에 방치됐던 초대형 유조선 ‘세이퍼’ 인양 작업이 30일(현지시간) 시작됐다.
10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저장한 채 표류하던 세이퍼는 몇 년 새 심각한 부식으로 곳곳에 구멍이 뚫려 이대로 가다가는 최악의 원유 유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하지만 최근 훈풍이 불기 시작한 중동 정세에 국제사회의 세이퍼 구조 작전도 탄력을 얻게 됐다.
AP통신 등 외신은 이날 세이퍼 상태를 확인할 선박 전문가를 태운 은데아보르호가 아프리카 지부티에서 출발해 세이퍼에 접근했다고 보도했다. 세이퍼는 현재 예멘 항구도시 호데이다에서 북서쪽으로 30㎞ 떨어진 바다에 좌초돼 있다.
전문가들은 우선 세이퍼 부식 정도를 살핀 뒤 원유가 새고 있는 구멍부터 메꿀 계획이다. 이어 세이퍼에 남아 있는 원유를 다른 유조선에 옮겨 담을 예정인데, 이번 작전을 지휘하는 유엔은 원유 이송 준비에만 1~2주가 소요되고 실제 이송엔 3주 이상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기름을 다 비운 세이퍼는 호데이다로 옮겨져 해체된다. 뉴욕타임스(NYT)는 “원유를 비우는 과정에서 위험 물질이 발견되는 등 변수가 발생하면 작업은 더 늦어질 수 있다”고 전했다.
세이퍼는 예멘 내전 상흔의 상징이다. 예멘 정부는 1980년대 세이퍼를 구매해 동부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임시 보관하는 용도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2014년 정부군과 후티 반군의 내전이 발발했고, 정부는 이듬해부터 세이퍼 유지·보수를 포기했다. 여기에 당시 세이퍼가 보관하던 약 110만 배럴에 달하는 원유 소유권을 놓고 정부와 반군이 대립하면서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세이퍼 상태가 악화했다는 점이다. 해수관 누수로 기관실에 물이 들어찼고, 선박 내 소방설비가 고장 나 폭발 위험이 제기됐다. 스탠퍼드대 등이 2021년 진행한 연구에선 세이퍼 원유가 모두 유출될 경우 예멘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권 900만명이 물 부족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결과도 나왔다. 홍해에 있는 항구 대부분이 폐쇄돼 중동 경제 체제가 마비될 것이란 우려도 컸다.
NYT는 전 세계 최악의 기름유출 사례로 꼽히는 1989년 엑손 발데스호 알래스카 좌초 사고를 언급하며 “당시 유출된 원유보다 약 4배 많은 기름이 세이퍼에 실려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해양 생물은 물론 어업 종사자 등 이 지역 공동체가 파괴될 위기였다”며 “수년간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세이퍼는 ‘생태적 시한폭탄’이었다”고 강조했다.
유엔이 세이퍼 인양 작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배경엔 사우디와 이란의 관계 회복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예멘 내전은 사우디가 정부군을, 이란이 반군을 지원하며 사실상 양국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하지만 지난 3월 사우디와 이란이 중국 중재로 화해하면서 예멘 내전도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물밑에선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아랍권 매체 알아라비아는 “결국 사우디와 이란의 외교 복원이 중동의 평화 분위기를 조성했고, 세이퍼 구조 작업도 추진력을 얻게 됐다”고 평가했다.
다만 유엔은 “이번 작전에 1억4300만달러(약 1892억원)가 투입될 전망”이라며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자금을 모으고 있지만, 2900만달러(383억원)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손우성 기자 applepi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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