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임대인은 투기꾼, 임차인은 배은망덕?

채신화 입력 2023. 5. 3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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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역전세에 전세폐기론까지
혼란속 임대인-임차인 애꿎은 갈등만
위협받는 '서민 주거사다리' 어쩌나

"무주택자들한테 월세 맛을 보여주고 싶다"

한 부동산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고 아찔했습니다. 임대차시장 혼란으로 '전세폐기론'까지 제기된 가운데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모습인데요. 

심보가 못 됐다고 보기엔 임대인들의 상황도 만만치 않습니다. 전세사기, 역전세 등에 따른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례가 나타나자 모든 임대인을 마치 '투기꾼', '사기꾼'으로 폄하하는 시각이 일부 있거든요. 선량한 임대인들까지 손가락질 받는 분위기가 생기자 억울함이 분노로 바뀐거죠.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임대인과 임차인의 '불편한 관계'는 어제 오늘 일은 아닙니다. 전세의 본질만 따져보면 임대인 입장에선 전세보증금을 받아 목돈을 굴릴 수 있고, 임차인은 자가 마련 때까지 보증금을 내고 살 수 있어 그야말로 '윈윈' 하는 제도인데요. 

그 안에서 갑과 을이 생기다보니 불편한 상황도 자주 나타났거든요. 집을 빌려 사는 데다 보증금까지 맡긴 임차인이 을의 입장이었죠.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임대인이 당연히 임차인의 보증금을 돌려줘야 하는데 새 임차인이 구해질 때까지 돌려주지 않는 게 당연시 되기도 했고요. 

판도가 바뀐 건 2020년 8월 임대차2법(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 시행부터입니다. 임차인의 권리가 강해진 가운데 지난해부터 집값과 전셋값이 동반 하락, 임차인 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임차인 우위 시장이 형성됐는데요. 

여기에 지난해 말 '빌라왕' 사태가 불거지자 전세사기 공포가 임대차시장을 뒤덮으며 전세 기피 현상까지 나타났고요.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2018~2019년만 해도 서울 아파트 임대차거래 중 전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70%대였다가 △2020년 68.5% △2021년 60.4% △2022년 56.2%로 눈에 띄게 줄고 있는데요. 지난해 12월엔 전세 거래 비중이 절반 아래(47.7%)로 떨어지기도 했고요. 

정부는 전세사기특별법을 비롯해 각종 대책을 내놓으며 임대차시장 안정에 나섰는데요. 그 과정에서 '임대인=투기꾼' 프레임을 씌웠다며 임대인들의 불만이 커졌습니다. 일부 악성 임대인이 전세사기에 연루된 건데 다주택자, 갭투자자, 주택임대사업자 등이 전세사기 주범인 것처럼 비췄다는 건데요.

부동산 상승기 때는 이들이 집값을 올렸다고 지적하더니 이번엔 전세사기 원흉인것처럼 몰리니 억울할 수밖에요.▷관련 기사:[기자수첩]이번엔 00가 집값 상승 주범이라고요?(2021년7월30일)

그러자 일부 임대인들은 차라리 전세를 없애자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임대차시장이 월세화 되면 오히려 월셋값이 오르면서 임대인 입장에선 더 이득이라는 거죠. 부동산 커뮤니티를 보면 전세 폐지를 외치며 '전세 주는 사람을 악마 취급 한다', '사기꾼 취급 그만 당하고 싶다'고 토로하는 글들이 눈에 띄는데요. 

서울 아파트 임대차거래 전세 비중 추이./그래픽=비즈워치

결국 임대차시장 혼란에서 번진 분노가 임대인과 임차인 서로 간에 '혐오'의 시선으로까지 이어진 겁니다. 전세사기가 임대인만의 탓도 아니고, 전세 제도가 임차인만을 위한 임대 유형도 아닌데 말이죠. 

전문가들은 전세제도 자체보다는 전세대출의 문제점을 꾸준히 지적해왔습니다. 전세는 사인 간 거래인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개입해 무분별하게 공적 보증을 서주면서 전세대출을 남발한 게 원흉이라는 거죠. 

실제로 전세 대출은 지난 2006년 영세 세입자를 위해 나왔다가 서서히 확대된 건데요. 애초에 서민을 위한 상품이었던 만큼 금리도 싸고 규제에서도 제외됐었습니다. 

그러다 갭투자자들이 '빚 내서 집 사라'는 시대에 올라타기 시작했고, 전세대출이 워낙 잘 나오다 보니 현금이 얼마 없어도 집을 샀던 투자자들이 부동산 하락기를 맞아 역전세난에 허덕이게 된 거죠. 

정부의 허술한 대책도 지금의 사태에 한 몫 얹었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는 투기를 조장하고, 문재인 정부 때는 매매 대출은 막으면서 전세 대출은 열어놓는 등 부작용과 허점이 줄기차게 나왔거든요. 

여기에 최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전세 제도의 수명이 다했다며 근본적으로 손질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또다시 여러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는데요.▷관련 기사:원희룡 "전세제도, 수명 다해 근본 검토…신고제는 1년 유예"(5월16일)

물론 더이상 임대차시장에서 선량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제도의 허점 등을 손질할 필요는 있어 보이는데요. 그 과정에서 또다시 본질을 잃을까봐 걱정입니다. 

부디 정부가 전세 제도가 무주택자들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을 잊지 않기를, 그 과정에서 임대인과 임차인의 갈라치기가 더 심화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채신화 (csh@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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