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황은후의 연기…‘팔꿈치를 조숙하게’, 어떻게 하지?

한겨레21 2023. 5. 3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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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몸]몸으로 역할을 입는 배우 겸 창작자 황은후씨
배우 창작자인 황은후 씨. 연기를 시작할 당시 그는 ‘배우는 백지 상태의 몸을 지녀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지금은 자기 몸을 낯선 감각에 열어놓은 채 자신의 감각과 만나게 한다. 그로써 자신이 연기해야 할 인물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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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주로 취하는 포즈는 뭘까?”

등장인물인 두 과학자가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연출가와 배우들이 머리를 맞댄다. 등장인물이 실제 한다면 취했을 자세를 짐작해본다. “과학자에게 발달하는 근육이 어디일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 반성했다. 내 인터뷰이들의 근육을 상상해본 적이 있던가. 배우들은 무릎을 세워 앉아도 보고, 의자에 앉기도 하고, 마주 서기도, 거리를 두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도 한다. 연극이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몸을 써서 표현함이란 이런 거구나.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불행

‘베테랑의 몸’ 연재는 몸과 노동에 관한 이야기이고, 몸을 쓰지 않는 노동은 거의 없다지만, 몸을 ‘쓴다’고 한다면 몸을 움직여 표현하고 말하고 노래하는 직업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배우를 만났다. 연극 같은 표현 장르에서 베테랑을 찾는 건 너무나 조심스러운 일이다.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주변 공기가 달라지는 배우들이 있다. 노배우 몇 명이 떠올랐으나, 이내 지웠다. 조금 다른 결로 ‘몸 쓰는 일’에 관해 말해줄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몸은 그저 몸이 아니니까. 어떤 인물로든 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배우의 몸도 그저 몸이 아니다.

배우는 무수한 훈육의 결과로 여자(남자)로 만들어진 몸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 여자와 남자로 나뉜 역할을 재현한다. 머리가 짧거나 근육이 발달한 여자 배우들이 오디션에서 번번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무대에서 연기해야 하는 ‘여자’는 대부분 머리가 길고 잔근육조차 없이 매끈하고 연약하니까.

“배우는 선택받는 입장에 놓인 직업이잖아요.”

그 선택과 재현에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에게 연기라는 일에 관해 듣고 싶었다. 배우이자 창작자인 황은후(40)씨를 만났다.

“고등학교 때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는데, 저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어떤 밀도 같은 게 느껴져서. 내가 실제로 있는 여기보다 저곳이 더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반했던 것 같아요. 몹시 압도적인 경험이었죠.”

나는 그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 어떤 경험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니 그와 내가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작업을 하는 거겠지. 배우들이 연기하는 “사람들을 둘러싼 감정과 경험. 그에 따라오는 평형, 온도, 압력과 같은” 것을 열일곱 살의 황은후는 보았던 걸까. 이후 그 감각을 몸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했다.

대안학교에서 연극반 활동을 했다. 대학에선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러다 배우를 직업 삼아야겠다고 생각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 전문사 과정을 이수했다.

“처음으로 연기에 대해 배우잖아요. 이전에는 배우가 타인의 시선으로 내 몸을 인식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연기를 배우면서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보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불행했던 것 같아요.”

그건 타인에게 예쁘거나 멋지게 보여야 한다는 것과 달랐다. 자신을 백지상태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배역으로 다른 인물을 만나려면, 그 인물을 내 몸에 채색할 수 있도록 깨끗하게 비운 흰 도화지 같은 상태여야 한다고 이해했어요. 몸도 가지런하게, 동작도 효율적으로. 내가 가진 습관을 모두 제거한 깨끗한 상태로 만들자.”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많은 고민과 교감, 반복되는 연습이 필요하다. 내면의 감정을 몸짓과 표정, 목소리로 표현해야 하는 일은 섬세함을 요구한다. 연극 <너의 왼손이 나의 왼손과 그의 왼손을 잡을 때>(정진새 작)를 연습 하는 배우들.

마모된 몸에서 나오는 생명의 힘

그런데 연기 동작을 할 때마다 몸에 버릇처럼 붙은 군더더기를 신경 쓰며 움직일 순 없다. 몸을 비우는 과정은 반복된 훈련과 연습으로 이뤄졌다. 그건 마치 어떤 일이 몸에 붙어 습관이 되도록 만드는 것과 비슷했다. 깨끗한 상태가 몸에 달라붙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니 일상에서도 자기 몸을 객관화해보려고 애썼다.

“그렇게 내 몸을 외부의 시선으로 지켜보면서 제어하고 교정해야 하는 대상으로 둔 거죠.”

여기에는 모순이 하나 있었다.

“당시엔 그 깨끗한 상태와 더불어 이 사회에서 매력적인 여성의 것이라 하는 상태가 나에게 있어야,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깨끗하지만 매력적이어야 해. 상반되는 것을 동시에 가지려 한 거잖아요. 두 개가 충돌해서 몸이 계속 싸우는 거예요.”

그러니 힘들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제가 무대에서 배우에게 보고 싶은 건 그게 아니더라고요.”

황은후가 찾은 답은, 대안학교가 있던 작은 도시의 소극장에서 찾아낸 그때의 경험과 비슷했다. 저 무대 위가 진짜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싶던 활력. 그 연기하는 몸들이 표출하던 생명력.

“제 관심은, 한 사람을 둘러싼 세계와 그 세계 안에서 그의 몸이 어떤 감각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더라고요. 로프를 타는 사람에게 놓인 시간과 압력이 그 사람의 세계를 만들잖아요. 아이를 품에 안은 사람이 느끼는 무게와 질감은 또 다를 거고. 그게 삶의 감각인 거고. 그 감각은 가지런한 몸이 아니라, 흔들리고 흐트러지고 기울어지고 떨리고 그래서 어딘가 마모된 몸에서 나오는 거더라고요. 여기서 활기나 생명의 힘이 드러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과제가 생긴다. 사람이 지닌 감각과 힘을 어떻게 잘 들여다보고 꺼내와서 자신의 것과 만나게 할 것인가. 그는 “잘 만나게 해, 무대에 잘 올려놓고 싶다”고 했다. 배우인 그가 지닌 자신의 감각은 무엇이기에 둘이 만나야 한다는 걸까. 한때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불안이라고 했다.

연극 <너의 왼손이 나의 왼손과 그의 왼손을 잡을 때>(정진새 작)를 연습 하는 배우 황은후.

‘보이는 몸’으로 살아야 하는 고민

무엇이 불안했을까. 그 이유를 황은후는 동료 배우인 김정과 함께 찾아갔다.

“학교 다닐 때부터 연기에 관해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하던 친구인데, 그때 저희 둘 다 그다지 콜을 받지 못했어요.”

서른 초반, 학교를 졸업하고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대학원생 신분일 때는 외부 공연을 자유로이 할 수 없었다. 휴학하고 공연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했다. 그렇게 졸업하고 세상에 나오니, 요즘 말로 스펙이 별로 없는 배우였다.

“이 친구가 우연히 소액의 창작지원금을 받게 됐어요. 90만원이었나. 이걸로 우리 연극이나 만들어볼까?”

진짜로 공연을 올렸다. 무대도 작고 관객도 적었지만, 즐거웠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창작집단 ‘사막별의 오로라’를 만든다.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하고 소품을 만들고 조명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일까. 황은후는 배우이자 창작자로 자신을 소개했다.

“배우 정체성을 가지고, 배우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창작해나가기 때문에 배우 창작자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것 같아요.”

‘사막별의 오로라’가 만든 연극은 두 사람이 가진 문제의식을 작품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들이 꺼내드는 이야기는, 이 사회에서 여성의 몸을 지닌 사람이 겪는 일이었고, 동시에 ‘보이는 몸’으로 살아야 하는 배우의 고민이기도 했다.

“얼굴은 청순하게, 가슴은 섹시하게, 엉덩이는 순진하게, 팔꿈치는 조숙하게.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하인드 비하인드’라는 괴물이 나타나 외모를 꾸미지 않는 여성을 잡아가자, 두려움과 강박에 휩싸인 도시에는 ‘뷰티 열풍’이 분다. 황은후와 김정이 무대에 올린 연극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2>의 내용이다. 연극 대사를 보며 생각한다. ‘얼굴은 청순하게’라고 쳐도, 엉덩이는 어떻게 순진하게 하지? 팔꿈치마저 조숙한데 어떻게 ‘자신 있게’ 있으라는 거지?

그러나 안다. 논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마땅히 해야 한다’이다. ‘지금’의 상태가 아니라 ‘어떤’ 상태로 도달해야 한다고 정해둘 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목표를 세우고 따라잡으려고 애쓸 것이다. 그렇게 ‘여자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는’ 여성이 태어난다. “조심하세요!” 그곳 여자들은 외친다. 팔꿈치가 까매도, 어깨가 넓어도, 종아리가 굵어도 괴물에게 잡혀가니까. 불안이 엄습한다.

“초반에 제가 느낀 불안은, 불안한 몸에서 오는 감각과 이어진 것 같아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세계 속에서 여성으로 느끼는 불안이 나에게 있고, 대학로에 진출하는 젊은 여성 배우들이 창작자로부터 그 강요를 알게 모르게 받는 것 같다. 이게 뭔지 한번 들여다보자.”

연극 <너의 왼손이 나의 왼손과 그의 왼손을 잡을 때>(정진새 작)를 연습 하는 배우들.

배우로서의 성장은 좋은 터가 된다는 것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몸에 관한 워크숍을 열었다. 그곳에서 1㎝의 몸을 발견한다.

“어쩔 줄 모르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불안한 몸에 대해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계속 이야기하다보면 의미가 다르게 전환되잖아요. 연극을 준비하는 건 그런 과정이었어요. 미에 관해 내가 학습한 생각을 쪼개고 쪼개어보니 ‘1㎝씩 움직이는구나’가 되는 거예요. 배를 1㎝ 넣을게요. 가슴을 1㎝ 내밀고. 어깨를 1㎝ 기울이고. 이런 조정을 끊임없이 하는 몸을 실제로 느끼면서, 몸의 움직임을 실험해보고 싶어진 거죠.”

연극은 즐거웠다. 배우 인터뷰도, 관객 후기도 모두 즐거웠다고 말한다. 블랙코미디 연극이라서? 아니다. 그에 앞서 배우가 감각한 세계가 관객에게 전해졌기 때문일 테다. 황은후의 표현에 따르면, 그 세계의 생명력이 전해진 거겠지. 그는 인물이 지닌 활기를 무대에 올리는 배우인 동시에, 그 자신도 어떤 생의 감각을 지닌 채 에너지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성소수자 이야기(<와이프>), 임신중지권에 관한 이야기(<마른 대지>), 제헌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룬 이야기(<당선자 없음>), 최근에는 공상과학(SF) 형식을 가져온 연극(<너의 왼손이 나의 왼손과 그의 왼손을 잡을 때>)까지.

“배우란, 다른 인물일 수도 있고 다른 동물일 수도 있고 다른 사물일 수도 있고, 다른 역할을 자신의 몸으로 입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잖아요. 연기하는 대상과 만나기에 좋은 터가 돼가는 게 배우로서의 성장인 것 같아요.”

좋은 터가 되기 위해, 자기 몸을 도구로 쓰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 몸을 교정하지 않는다. 터전이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명력이 발휘되는 좋은 터를 찾아서 나를 거기에 데려다놓으려 해요.” 내가 감각을 열어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에 놓여야 다른 인물도 받아들이는 좋은 터가 될 수 있다.

“이제는 무리하게 모든 작업을 밀어붙이지 않고, 때로는 나를 믿고 멈춰요.”

자신의 판단에 더 힘을 실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일을 좀 쉬어가면서, 이 기간에 수영 같은 다른 일을 하면서 보내는 게 결국은 훨씬 더 내 작업에 좋다는 생각을 한 게 몇 년 안 됐어요.”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아직 그의 연극 연습 일정이 잡히기 전이었다. 그는 수영을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하루에 두 번 수영장에 갈 때도 있고, 다른 지역으로 갈 때는 그곳 수영장을 꼭 들렀다. 물속에서 헤엄쳐 움직이는 감각이 황은후에게는 마냥 새롭다.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과 나누는 대화와 현란한 색의 수영복까지.

“저를 계속 새로운 세계에 초대하기, 그게 제가 쉴 때 하는 일 같아요.”

감각만이 아니다. 몸도 풀어둔다. 그건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몸인지 파악하는 일이라고 했다. “정신이 유연해져도 몸이 유연하지 못하면 그 표현을 할 수 없으니까요.” 성별화된 젠더 규범에 막혀 있던 나를 풀어내고 싶어도, 몸이 그에 맞춰 유연해지지 못하면 재현은 실패한다. 그러니 몸을 쓴다. 자유로이 쓰고, 안 쓰던 모습으로 쓴다.

연극 <너의 왼손이 나의 왼손과 그의 왼손을 잡을 때>(정진새 작)를 연습 하는 배우 황은후.

베테랑을 꿈꾸는 이들이 입 모아 하는 말

인터뷰 마지막 즈음에 황은후는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일하면서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 별것 아닌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베테랑을 꿈꾸는, 또는 이미 베테랑이 됐다며 내 앞에 앉아 자기 일을 설명해주던 사람들이 입 모아 하는 말이었다. 이곳에서 오래, 잘 일하고 싶다. 그들의 일터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검은 분진이 날리고, 폐에 가스가 차고, 줄 하나로 고공에 매달리고, 자릿세를 내야 하고, 차별이 있고, 성희롱이 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평생 해온 일 자체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곳에서 ‘좋은 숙련자’가 되기 위해 한 걸음씩 걸어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늘 인터뷰 마지막엔 베테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는데, 그럴 때면 그들은 각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이야기했다. 관계, 성실, 연대, 인간다움, 가능성. 그걸 듣는 순간이 좋았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에 이런 문장이 있잖아요. ‘우리가 달까지는 갈 수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2022년) 나에게 올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살려고요. 베테랑이 무엇인지도 좀 상상하며 걸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보이는 몸으로 무대에 서서 다른 가능성의 몸을 보여준다. 그를 보는 우리가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도록.

글 희정 기록노동자·<두 번째 글쓰기> 저자, 사진 최형락

*‘베테랑의 몸’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희정·최형락 작가님,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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