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괴물의 홈그라운드 ‘텍사스 동부지구’를 피해라
삼성전자도 넷리스트에 패소 위기 경험
애플마저 매장 철수… 한국 기업도 신중해야
삼성전자가 반도체 특허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미국에서 4000억원에 이르는 거액을 배상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미국 텍사스 동부연방지방법원 배심원단은 지난 4월 21일 미국 반도체 기업인 넷리스트가 삼성전자를 상대로 낸 반도체 특허 침해 소송에서 넷리스트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가 최종 선고에서 배심원 평결을 유지하면 삼성전자가 넷리스트에 물어줘야 할 돈은 3억315만달러(약 4036억원)에 이른다.
업계에선 1분기 실적 악화에 처한 삼성전자가 이번 소송으로 2분기에 적자를 볼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한 삼성전자도 특허 침해 소송의 결과에 따라 실적이 크게 좌우되는 모양새다.
그런데 여기서 물음표가 붙는다. 왜 뜬금없이 텍사스 동부연방지방법원에서 삼성전자와 넷리스트의 특허 침해 소송을 심리하고 있는 걸까. 삼성전자는 한국 기업이고 미국 법인의 본사도 뉴저지주에 두고 있는데 말이다. 넷리스트도 텍사스가 아닌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에 본사를 두고 있다.
두 기업의 소재지인 뉴저지도, 캘리포니아도 아닌 텍사스주, 그것도 동부지구에서 재판이 열린 이유를 두고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국제 특허 전문가인 남현 법무법인 세움 파트너 변호사(한국특허법학회 이사)는 바로 여기에 한국 기업들이 주의해야 할 포인트가 있다고 지적한다.
◇특허권자의 홈그라운드 ‘텍사스 동부연방지법’
한국은 판사들이 정기적으로 근무지를 이동하는 반면 미국 연방지방판사는 한 법원에서 계속 근무를 하는 문화가 있다. 이렇다 보니 특정 판사의 성향이 해당 법원의 특징으로 작용한다. 텍사스 동부지방연방법원의 경우 연방지방판사가 한 명, 그를 보조하는 치안판사 역시 한 명만 근무하고 있다.
텍사스 동부지방연방법원은 2011년에 퇴임한 존 워드(T. John Ward) 판사가 오랫동안 일하면서 특허와 관련된 다양한 재판을 다뤘다. 워드 판사는 특허 소송을 신속하게 진행하는 규칙을 정립해서 다른 연방지방법원보다 소송의 진행 속도가 빨랐고, 특히나 특허권자의 승소 비율이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남 변호사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특허 침해 소송에서 특허권자의 승소율이 68%인 데 비해, 워드 판사가 맡는 사건에서는 승소율이 88%로 올랐다.
이런 경향은 워드 판사가 퇴임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면서 텍사스 동부지방연방법원의 특성으로 자리잡았다. 2011년에 부임한 로드니 길스트랩(J. Rodney Gilstrap) 판사 역시 특허권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른바 ‘특허괴물’로 불리는 특허관리전문기업(NPE)가 어떻게든 텍사스 동부지방연방법원에서 재판을 하려고 노력한 배경이다. 길스트랩 판사는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에서 특허 소송을 가장 많이 심리한 판사였고, 2015년에는 미국 전체 특허소송의 28%를 길스트랩 판사가 맡았다.
◇피고가 물건을 파는 곳이면 어디서든 재판이 가능한 미국 법
특정 법원에 이렇게나 많은 특허 소송이 몰릴 수 있었던 건 특허 침해 소송의 재판지(venue)에 대한 미국만의 독특한 규정 덕분이다. 미국 연방순회구 합중국항소법원이 1990년 판결한 VE홀딩스와 존슨 가스 얼라이언스사 간의 특허 침해 소송 판례(VE Holding Corp. v. Johnson Gas Appliance Co.)에 따르면, 피고인 기업이 특허를 침해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업을 영위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재판을 열 수 있다. 앞서 삼성전자와 넷리스트의 경우에 적용하면 꼭 두 회사의 본사가 있는 곳이 아니라 특허 침해 소송의 대상인 메모리 모듈을 삼성전자가 판매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재판을 열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미국에서도 특정 법원에 특허 소송이 몰리는 것에 대한 우려의 시선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연방대법원은 2017년 5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1990년의 판례에서 해석한 것과 달리 합중국법 제28장 제1400조의 ‘거주’에 대해 ‘법인이 설립한 주’를 의미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거주의 의미에 대해 제한적으로 보는 해석이 나오면서 텍사스주 동부지방연방법원에 특허 침해 소송이 접수되는 비율도 크게 줄었다.
이후에도 특허 소송의 재판지를 둘러싼 논의는 계속 이어졌다. 연방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인 2017년 6월 길스트랩 판사는 미국의 레이시언사와 크레이사 간에 특허 분쟁 사건에서 피고 크레이(Cray)의 재판 이송 신청을 기각해 논란을 일으켰다.
워싱턴주에 본사가 있는 크레이는 텍사스 동부지구에 사무소나 재산이 없었고, 재택근무하는 직원이 두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길스트랩 판사는 연방대법원이 제시한 ‘거주’의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이면서도 크레이의 직원이 텍사스주 동부지구에서 재택 근무를 하는 것이 기업의 대리인 활동에 해당한다며 텍사스주 동부연방지방법원이 적절한 재판지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크레이는 상급법원인 미국연방순회항소법원(CAFC)에 텍사스 동부지법의 결정을 무효로 해달라는 신청을 했고, CAFC는 특허소송 관할과 관련해 명확한 기준을 세웠다. CAFC가 세운 기준에 따라 특정 지구 연방지방법원이 특허소송의 관할권을 가지려면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
①해당 지구에 물리적인 장소(physical place)가 있을 것
②일정하고 확립된 사업장(regular and established place of business)일 것
③피고의 장소일 것
CAFC는 이 기준에 따라 재택 근무하는 직원이 있다는 것만으로 크레이의 사업장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며 크레이의 신청을 인용했다. 이 이슈는 국내 기업도 관련된 적이 있다. 미국의 스트라토스오디오(StratosAudio)라는 기업은 현대자동차 미국 법인을 상대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관련 특허를 침해당했다며 텍사스 서부연방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
텍사스 서부연방지방법원은 현대차 미국법인이 현지 딜러십에 대한 높은 수준의 통제권을 행사한다고 보고 실제 사업장이 텍사스 서부지구에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상급법원인 CAFC의 판단은 달랐다. 딜러십이 현지에서 자동차를 판매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스트라토스오디오가 현대차 미국법인이 딜러십의 활동에 대해 중간 지침을 제공할 권한을 포함해 필수적인 통제를 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본 것이다. 남현 변호사는 “에이전시 관계를 판단하는 지표로서 중간통제권을 중요하게 고려한다는 걸 알 수 있는 판례”라며 “에이전시의 활동을 일상적으로 통제하는 지가 중요한 기준”이라고 설명했다.
◇애플은 텍사스 동부지구서 매장 철수하기도
최근 들어 특허 침해 소송의 재판지에 대한 미국 법원의 판단이 엄격해지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한국 기업이 조심해야 할 부분은 많다. 넷리스트가 소송을 제기한 건 2020년으로 CAFC가 새로운 해석을 확립한 이후다. 삼성전자가 텍사스 동부지구에서 명확한 사업장이나 대리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텍사스 동부연방지방법원이라는 특허권자의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걸 막지 못한 셈이다.
바꿔서 말하면 텍사스 동부지구에 일정하고 확립된 사업장이 없다면 이곳에서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애플은 2019년에 텍사스 동부지구에 있던 매장 두 곳의 문을 닫고 직원들을 모두 댈러스로 옮긴 적이 있다. 삼성전자 만큼이나 특허괴물의 타깃이 되는 애플이 조금 더 현명한 판단을 한 셈이다.
남현 변호사는 “우리 기업이 미국에 진출할 경우 텍사스 동부연방지방법원 관할 내에 사업장이나 대리점을 두는 건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재판지에 대한 법리가 미국 법인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미국에 별도 법인을 설립하지 않는 경우에는 법리가 적용되지 않을 수 있지만, 외국 법인에 대해서만 ‘거주’ 요건을 완화해서 해석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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