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계절 나기위한 각각의 힘… 기억에서 길어내지요”

박세희 기자 2023. 5. 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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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당의 여신도 모임.

"참 고귀하지를 않구나, 이 사람들은"이라 생각하는 베르타에게 불현듯 떠오른 것은 마리아의 구취를 맡고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던 기억 하나.

"뭘 해보려다 잘 안 되면 우리는 주로 미래의 희망이나 약속에 기대 스스로 닦달하곤 합니다. 하지만 기억에서 찾는 편이 훨씬 도움이 돼요. 과거 속 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낯선 힘이 조금씩 고이지요." 기억에 천착해온 작가의 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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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소설집 출간한 권여선
“고귀하지 않구나 우리는…
단편집 전체 관통하는 문장”

어느 성당의 여신도 모임. 마리아의 부고가 전해진다. 신도들은 각자가 기억하는 마리아를 이야기하며 추모하지만, 그 속에는 마리아를 낮게 보는 은근한 배타성이 존재한다. “참 고귀하지를 않구나, 이 사람들은”이라 생각하는 베르타에게 불현듯 떠오른 것은 마리아의 구취를 맡고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던 기억 하나. 베르타는 생각한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

권여선(사진)의 단편집 ‘각각의 계절’에 담긴 ‘하늘 높이 아름답게’다. 최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작가 권여선은 이번 단편집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으로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을 꼽았다. “요즘 혼자 멋지고 고고한 사람은 많아도,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함께하는 고귀한 마음은 적지요.”

‘각각의 계절’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괴롭다. 이들의 밤잠을 설치게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다. 마리아와의 일화를 기억해내고 자신 역시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베르타가 그러하고, 대학 시절 내내 붙어 다닌 친구들과의 관계가 무참히 깨진 ‘사슴벌레식 문답’ 속 ‘나’가 그러하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오래 외면해온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서글픔을 그려낸 작품.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친구들은 여행 숙소에서 사슴벌레 한 마리를 발견하고, 어디로 들어오는 건지에 대한 질문에 주인은 “어디로든 들어와”라고 답한다. 어떤 질문에든 “든”을 붙여 답하는 게 사슴벌레식 문답이다. ‘나’는 ‘든’이라는 글자 속에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쩔래?’ 하는 식의 강요와 칼 같은 차단이 숨어 있다는 것을 30년이 지난 지금 깨닫는다.

권 작가는 “실제로 누군가가 한 말에서 따온 표현”이라고 했다. “토지문화관에서 어떤 작가가 큰 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는 거냐고 묻자 문화관 간사님이 어디로든 들어온다고 대답하시더라고요. 그 상황을 기록해두고 이런저런 응용 문답을 만들어봤어요. 처음엔 재미있었는데, 자꾸 하다 보니 무서워지기도, 슬퍼지기도 하더라고요.”

소설집의 제목 ‘각각의 계절’은 베르타가 한 말,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에서 비롯됐다. 새로운 계절에는 그 계절에 맞는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는 의미. 그 힘을 어디서 길어내냐는 질문에 권 작가는 “기억”을 이야기했다. “뭘 해보려다 잘 안 되면 우리는 주로 미래의 희망이나 약속에 기대 스스로 닦달하곤 합니다. 하지만 기억에서 찾는 편이 훨씬 도움이 돼요. 과거 속 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낯선 힘이 조금씩 고이지요.” 기억에 천착해온 작가의 변이다.

소문난 애주가이자 운동권 작가라 일컬어지는 그지만 신작에선 그보단 ‘기억’에 대한 탐구가 깊이 이뤄진다. “기억은 과거를 바꿉니다. 이게 기억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자 축복일 테죠. ‘나의 과거를 좀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으면 해요. 그게 지금의 나를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요.”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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