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모두가 첫날처럼』 김용택 “늘 마을을 뒤돌아보았다… 애잔은 내 시의 처음”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3. 5. 3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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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해질 무렵, 섬진강 강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길 앞에서 흰 배추잎나비 네 마리가 모여서 놀고 있었다. 나비들이 노는 곳으로 들어갔다. 나비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계속 그의 주위에서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장난 삼아 두 손을 휘휘 휘저었다. 나비들의 날개바람이 그의 손가락 사이 부드러운 살갗에 닿았다. 서늘한 바람결이⋯.

“해질 때 걸었다/ 호젓한 강길에 나비 네 마리가 놀고 있어서 같이 놀았다/ 나비들이 앉아 노는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두 손을 휘휘 휘저었다/ 나비들이 멀리 날아가지 않고/ 내 주위를 맴돈다/ 나비 나비 나비 나비/ 흰나비 네 마리/ 내 몸 주위를 뱅뱅 돌며 난다/ 내 손가락에 사이에 나비들의/ 날개 바람이 닿았다”(「나비하고 놀다」 전문)

나비가 날개 짓을 멈추고 바람에 누워서 바람을 타고 나는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바람이 끝나면 다시 날개 짓을 하면서 흘러가던 길을 거슬러 올라왔다. 그들은 바람의 특성을 알고 있었다. 권력이 아닌 자신의 날개와 날개 짓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나비들⋯. 그 나비처럼, 배경 없이 자율적으로 사는 삶이 좋았다.

“나비는 날개를 펼 때/ 권력을 이용하지 않는다/ 시인은 나비의 바람으로 정치를/ 기술한다”(「시인」 전문)

팬데믹 시절, 그는 매일 마을 한 바퀴를 돌면서 일기 외에 한편의 짧은 글을 썼다. 내용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이 흐르는 대로. 2년 전 인터뷰에서 “코로나 시절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코로나 이후의 삶이 달라질 것”이라며 매일 마을을 둘러본 뒤 하루 한편씩 글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부터 오전 5시쯤 현관을 나서 100미터 정도 되는 강을 건너가서 마을을 바라보고 다시 돌아온 뒤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하루 한편씩 글을 씁니다. 강을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사이 일어나는 일들, 마을 사람을 만난 이야기, 동네에 일어난 사소한 일들, 보고 느낀 것들을⋯.

2년 사이에 무려 500여 편의 글이 모였다. 지난해 11월 팬데믹 기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나비시편을 비롯해 많은 시들을 찾아냈다.

김용택 시인이 「나비하고 놀다」를 비롯해 팬데믹 시절 쓴 시 55편을 엮은 시집 『모두가 첫날처럼』(문학동네)을 들고 돌아왔다.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이후 2년 만이고, 첫 시집 『섬진강』 이후 14번째 시집이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팬데믹 시절 절감한 세상과 우주 만유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시력 41년, 고희를 훌쩍 넘긴 그의 문학적 여정은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일까. 김 시인을 29일 시집과 전화로 만났다.

―이번 시집에는 나비와 함께 바람도 많이 등장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하는 일이 굉장히 많은 것 같다. 구름을 데리고 다니기도 하고, 나무를 흔들어주기도 한다. 앞산에 바람이 분다든가, 강물에 바람이 분다든가, 문을 열고 나가면 바람이 휙 지나간다든가, 신비로워 보인다. 나비가 만든 바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바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진짜 끔찍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공기를 흔들어 주기 때문에 바람이겠지만, 공기와 다른 어떤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시집의 문을 여시는 시는 「등이 따뜻해질 때까지」. 별이 빛나는 어느 날 밤, 시인은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는데. 환한 밤에 밖으로 나갔다가 만나게 된 뭇 생명의 소리와 온기, 그것을 다시 한 번 건너다보던 순간의 마음을 예민하게 포착했다.

“창문이 밝아오자 창문을 열고/ 별들을 내다보았다/ 나무들이 곳곳에서 반듯하였다// 강 건너 길을 걸었다/ 어린 쑥들이 마른 풀밭 잔돌 곁에서 돋아났다/ 서리가 녹아 돌도 쑥도 젖었다// 누가 텃밭을 파는지/ 흙을 파고드는 호미 끝에 자갈 닿는/ 소리가 강을 건너왔다// 등이 따뜻할 때까지/ 강가에 앉아 있다가/ 왔다// 무엇인가를 두고 온 것 같아/ 강 건너 그곳을/ 한번/ 건너다보았다”(「등이 따뜻해질 때까지」 전문)

시 「슬픔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별들의 표정을 나는 알아요」에는 매일 마을을 둘러보는 시인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 그는 “오래 들여다본 시”라면서 “슬픔으로 기쁨을, 아름다움으로 슬픔을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말했다.

“마을은 나의 학교입니다/ 새벽이슬들을 깨우며/ 텃밭 일을 하는 농부들은 나의 선생입니다/ 같이 늙어가도 밭을 곱게 고르는 사람에게서 사람을 배웁니다/ 그들은 농기구에 힘을 주지 않습니다/ 농경은 시대착오 없이 한결 같습니다/⋯나는 늘 마을을 뒤돌아보았습니다 애잔은 내 시의 처음이었으니까요”(「슬픔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별들의 표정을 나는 알아요」중에서)

마을을, 강과 산길에서 우주만유의 경이만 만나는 건 아니다. 삶의 무상과 그에 따르는 슬픔이나 후회 역시 만날 수밖에 없으니. 시 「나무에게」와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등은 어떤 무상이나 후회 같은 것을 만나던 순간이 담겼다.

“나무야/ 봄은 오고 있다/ 너를 올려다본다/ 내 나이 일흔여섯이다/ 이제 생각하니/ 나는 작고 못났다/ 그런데다가/ 성질도 못됐다/ 나무야/ 근데 내가 인자/ 어찌하면 좋을까”(「나무에게」 전문)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되돌아보니 온갖 상처와 부끄럼 투성이인 누추한 모습⋯. 시인은 나무 앞에게서 무슨 말을 듣게 될까. 우리는 과연 미래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나는 오랫동안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가르친 대로 살지 못했다/ 아이들도 커가면서 배운 대로 살지 않았다/ 나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괴로워했다”(「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중에서)

그럼에도 모든 존재와 삶은 온갖 것이 품고 있다. 결국 부질없을 지라도, 어느 순간 환하게 피어나는 뜨거운 감정도. 시 「쓸 만하다고 생각해서 쓴 연애편지」가 그렇다. 그는 “오래 전에 써놓은 시들을 뒤지다가 찾아서 새롭게 쓴 시”라고 소개했다.

“창문을 열어놓고 방에 누워 있습니다/ 바람이 손등을 지나갑니다/ 이 바람이 지금 봄바람 맞지요? 라고/ 문자를 보낼 사람이 생겨서 좋습니다/⋯당신에게도 이 바람이 손에 닿겠지요/ 오늘이나 내일 아니면 다음 토요일/ 만나면 당신 손이 내 손을 잡으며/ 이 바람이 그 바람 맞네요, 하며/ 날 보며 웃겠지요”(「쓸 만하다고 생각해서 쓴 연애편지」 중에서)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은 서로에게 의미를 줘야 한다. 지금 할 일을 지금 하면서. 딴 생각하지 말고. 「꽃이 나를 보고 있다」지 않는가.

“꽃에 물을 주며 생각한다/ 지금 꽃에 물을 주는 일을/ 성실하게 이행하자/ 다음에 할 일을 지금 생각하다보면/ 꽃에 물주는 일을 서두르게 되고/ 꽃에 물주는 일이 허술하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꽃에 물을 주며/ 딴생각하는 내가/ 나를 타이르는 것이다/ 꽃이 나를 보고 있으니까”(「꽃이 나를 보고 있다」 전문)

결국, 살아 있는 존재는 서로를 매 순간 첫날처럼 새로이 마주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시집 제목을 『모두의 첫날처럼』으로 정한 이유에 대해서, 시인은 말했다.

“우리 모두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아까와는 다른 지금을 살고 싶어 합니다. 늘 보던 나무들이 새로 보이면 그게 사랑이지요. 아니면 이별이거나.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이나 세상의 모든 일들이 ‘새로운 첫날’을, 그것도 ‘우리 모두의 첫날’을 위한 노력일 것입니다.”

그는 시집 「시인의 말」에서 더 이상 “시를 기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신 자연 속에, 사람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는 시인이⋯. “봄비 걱정을 하고/ 이웃집 근심도 같이 나누면서/밭을 고르는 선량한 농부 곁에/ 서 있다 간다”

가을 무렵, 섬진강이 천천히 흐르는 전북 임실의 시골 초등학교 분교에 정장을 한 월부 책장수가 나타났다. 책장수는 도스토예프스키 전집과 카달로그를 보여주면서 물 흐르듯한 말솜씨로 세일즈를 했다.

순창농림고를 졸업한 이듬해 친구 따라서 교사시험을 봤다가 덜컥 합격해버린 스물 하나의 젊은 교사는 일곱 권짜리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덜컥 샀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 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고, 책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던 그였다. 더구나 주위에서 책을 읽는 사람도 거의 없을 때였다.

물론, 그가 처음에는 책을 읽고 싶어서 산 것이 아니었다. 책의 표지와 장정, 긴 수염에 우울해 보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사진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한동안 책들을 자신의 방 윗목에 놓아뒀다, 아니 모셔뒀다. 그러다가 겨울방학 때 문득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였다. 책에 빠져들자 시간이 아까웠다. 밥 먹는 시간도, 화장실을 가는 시간도. 겨울방학 동안 전집을 다 읽었다.

책장수에게서 다른 전집도 차례로 사서 읽어나갔다. 헤세 전집, 지드 전집, 괴테 전집, 이어령 전집, 박목월 전집, 서정주 전집…. 이어서 오십 권짜리 한국문학전집을 새로 부임한 초등학교의 동료 교사에게서 싸게 사서 읽었고, 각종 단행본이자 잡지를 전주 책방에서 사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생각과 고민이 넘쳐나자, 어느 순간 생각과 고민을 일기 비슷하게 쓰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시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마치 도둑처럼. 섬진강처럼 그의 삶도 흘러가기 시작했다. 문학의 세계로, 시인의 길로⋯.

1948년 임실군 진메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용택은 1982년 창작과비평사의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등 9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등단 이후 1985년 『섬진강』을 비롯해 『맑은 날』, 『누이야 날이 저문다』, 『꽃산 가는 길』, 『그리운 꽃편지』, 『나무』, 『연애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울고 들어온 너에게』, 『나비가 숨은 어린 나무』 등 13권의 시집을 펴냈다.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윤동주상 등을 수상했다. 특히 「섬진강」 연작으로 유명해지면서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기도. 스물한 살에 초등학교 교사가 된 이래 40년간 교직에 몸담았다.

―시 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크게 보면 시가 그 시대적 정신이나 정서를 담아내느냐, 그 시대 사람들이 가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정서를 담아내느냐가 중요하다. 세상은 변한다. 시인이 먼저 변하기도 하고, 세상이 먼저 변하기도 한다. 처음 「섬진강」 연작시들은 농민들의 삶과 슬픔, 분노, 억울함의 정서가 강하게 배어 있다. 조금 시간이 흘러서 사랑 이야기도 많이 담았다. 시집 『키스를 원하는 입술』 등에는 우리 인류의 문제, 원치 않는 세계를 인간들이 이끌어가는 정서가 담겨 있고, 시집 『울고 들어온 너에게』에선 시골에 들어오기 직전 도시에서 있었던 일을 적으며 제 생각을 드러냈다. 이번 시들은 한발 더 나아가서 어디선가 빠져나오고 싶고 어디선가 벗어나고 싶은, 새로운 세계를 그렸다. 정치적이든 인류적으로 힘겨운 삶의 국면이 많은데, 거기에서 풀려나고 싶고 벗어나고 싶었다. 전체적으로 제 시들은 섬진강으로 주제로 한 자연생태적인 것인데, 그 속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것을 담으려고,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시 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이 있는지.

“나의 말인지, 내 옷 같은지 먼저 살펴본다.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아울러 세상하고 맞물려 있는지,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거나 세상으로부터 소외받지 않고, 세상과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내게 맞는 말이 세상에 나가서 세상과 긴장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내가 되었다 싶을 때, 세상과 들어맞을 때, 그때 시가 되는 것 같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시인은, 오늘도 섬진강 언저리를 부지런히 배회할 것이다. 고요가 내려앉은 이른 아침이나 마음이 차분해지는 해질 무렵, 가끔은 달이 마음을 들뜨게 하는 밤이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야기할 것이다. 달과 바람, 나무, 산앵두꽃, 참새, 나비, 우주 만유를. 그리하여 달이나 산, 바람, 나비를 시 속으로, ‘한편’으로 모셔올 것이다.

“나의 말이 나의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 모두의 말이 되기도 하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내 시가 세상과 ‘한편’이 되기를 나는 원합니다. 나는 늘 내가 사는 작은 마을의 말을 충실하게 따르고 싶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지 않고 날개를 펴는 나비의 날개를 생각합니다.”

산이나 들이나 바람이나 나비에서 시가 나오지만, 시에서 태어난 이들 산이나 들이나 바람이나 나비는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 더 이상 작고 나약하고 무기력한 이들이 아니다. 그렇게 그는 우주 만유와 ‘한편’이 되고, 어느 새 우주 만유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비는 시에서 태어났다/ 말로 날개를 단 것들의 괴로움을 알고 있는 그 나비는/ 다시는 시에 앉지 않는다”(「다시는, 다시는」 전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김용택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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